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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마 Jun 20. 2024

거꾸로 생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퇴사자처럼

첫 회사와 첫 퇴사가 내게 남긴 것

2024.06.04


"어떻게 지내셨나요?"

"퇴사했어요."


어떤 벌을 받더라도 성에 차지 않을 듯 자책에 짓눌릴 때는 타인의 비난이 도피처가 된다. 번아웃을 경고하던 정신과 의사에게 앞뒤 없이 퇴사 소식을 알렸다. '기어이' 때려치웠냐는 반응이 돌아온다면 차라리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이곳저곳으로 조각나 흩뿌려지기만 했지 온전히 몸체를 드러낸 적은 없던 내 퇴사 사유가, 여러 번 뱉어져 잘 다듬어진 이야기처럼 흘러나왔다. 의사의 경청에 비밀 하나 더 얹고 싶을 만큼 흥이 났다. 엎드려 절 받듯 "잘 결정하셨네요."라는 말을 거듭 받아내고서야 시치미를 떼듯 아쉬워졌다. 그는 한 마디 점잖은 타박도 없이 진심으로 내 선택을 존중하는 듯했다.




병원을 나선 후 평일 낮이라 한산한 코인 노래방에 갔다. 오늘의 레퍼토리는 체리필터의 'Happy Day'로 시작했다. '이제 나는 딸기향 해열제 같은 환상적인 해결책이 필요해/ 징그러운 일상에 불을 지르고 어디론가 도망갈까...' 노래방에 가면 늘 두더지 잡기처럼 한 곡 다 끝나기 전에 다음 부르고 싶은 노래가 생각난다. 호기롭게 오천 원 넣고, 천 원을 다시 세 번 더 넣고 나서, 강산에의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이란 노래가 생각났다.


'그래도 나에겐 너무나도 많은 축복이란 걸 알아/ 수없이 많은 걸어가야 할 내 앞길이 있지 않나...'


적잖이 듣고 불렀던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었던가. 숨이 막힐 것 같은데 이게 왜 축복일까 싶었다.




오후 2시에는 상담이 있었다. 상담사가 날 더러 밝아지고 예뻐졌다 했다. 퇴사의 약효를 온몸에 두르고 의기양양해진 나는 의사가 그랬듯 상담사도 열렬히 내 편일 줄 알았다. 정당히 혼나지 않았다는 양심의 가책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그는 예리하고 유능했다. 열과 성을 다해 전 직장을 악마화하고 있던 내 기울어진 잣대를 균형점에 돌려놓고자 했다. 상담사의 말들은 아프고 반가웠다. 상담실을 빠져나오며 비로소 속이 시원해졌다. 그저 혼나고 싶었던 것도, 무작정 공감받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내 반년의 시간을 바로 보고 정리하고 싶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2024.06.20


딱 저기까지 쓰고 글쓰기를 멈췄다. 그로부터 보름이 흘렀다. 정리한다고 해놓고 사실 하기 싫었던 것 같다. 엉킨 실타래를 풀고 싶지 않은 기분이다. 이렇게 솔직히 쓰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러지 않으면 영영 아무 글도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6월 4일의 나는 내가 지난 6개월의 경험을 말끔히 정리하고 곧장 앞으로 나아가리라 믿었다. 그때의 나는 제법 '힘찬 퇴사자'다웠는데... 그런데 실상은 보름째 가라앉고 있는 것 같다. 


'그래도 나에겐 너무나도 많은 축복이란 걸 알아/ 수없이 많은 걸어가야 할 내 앞길이 있지 않나...'


하지만 어쩌면 나는 6월 4일에도 여전히, 혹은 그전에도 은밀히 나를 속이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때도 나는 저 구절이 숨이 막힌다고 했으니.


내 퇴사가 최선의 선택이었어야 하고, 그러니 밝고 행복해야 한다는 생각도 어쩌면 건강하지 못한 믿음 혹은 강박이 아니었을까 싶다. 차라리 최선을 다해 솔직해지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래 나는 지금, 혼란스럽고 불안하고 부끄럽다.


'첫 회사와 첫 퇴사가 내게 남긴 것'을 주제로 쓰고 싶어서 소제목을 저렇게 지었는데 정작 그 내용만 쏙 빠진 글이 됐다. 하지만 억지 교훈을 짜내서 성급히 마무리 짓는 것도 영 못할 짓이 아닌가 싶다. 어차피 이 글은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못했으니 모순 하나를 더 남기기로 한다. 언젠가 시간 지나서 정말 첫 퇴사가 내게 남긴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닫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 덧붙여도 충분하다. 아니, 사실 더 안 써도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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