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동으로 태어났다. 물론 내가 원한 것은 아니었다. 성장 과정에서 으레 들어온 "외동이냐"는 말이 커갈수록 소름 끼치게 싫었다. 어릴 땐 '어떻게 맞췄지?' 하는 생각에서 그쳤지만 점점 사람을 알아갈수록 그 표정이나 한마디 말은 '너 이기적이다, 형제자매가 없어 그런가?' 하는 뉘앙스로 들렸다.
외동 프레임에서 벗어나려 부단히 노력했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그리고 했었던 일들은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려는 것이었다. 가정에서 부모님의 큰 사랑을 유일하게 받는 나는 양보라는 것을 몰랐다. 우리 집 모든 것들은 내 것이고, 쟁취하고 나눠가지지 않는 사랑도 당연히 내 것이었다. 크고 나서 티비 육아 프로그램을 볼 때, 내 허벅지 만한 키의 작은 아이들이 자기와 마찬가지로 작은 다른 아이들한테 "너 가져", "너 해", "네가 먼저 해" 하면서 양보하는 모습을 보면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이유가 난 한 번도 그래 본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 아이들처럼 작았을 내가 그 때도 해보지 않았던 일인데 한참 다 크고 나서 내 것을 남과 나눈다는 것은 더욱 쉽지 않았다. 유형이든 무형이든 그 모든 것을 상대와 주고받을 때 몹시 어색하고 부끄러웠다. 내 의도가 들키는 기분이었다. 너에게 나를 잘 봐달라고 하는 행동인가 싶어 자존심이 많이 상하기도 했다. 언젠가 하루 엄마한테 이런 내 상황을 말했다.
"머쓱하게 이걸 꼭 이래야 해? 나한테 돌아오는 게 뭔데. 당장 내 손에 쥐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 쟤들한테 내가 그래야 하는 이유가 뭔데? 세상 혼자서도 살 수 있는 거 아니야? 내 노력, 시간, 에너지를 들여서 저 바보 천치들한테 내가 도대체 왜."
엄마는 조용히 듣고 있다 나에게 우주의 법칙을 아냐고 물었다.
"그게 뭔데" 대답하고 엄마가 하는 말을 기다렸다.
“세상에는 우주의 법칙이 존재해. 우주의 법칙이라는 건 너한테 설명하려고 엄마가 지어낸 말이긴 한데, 살아 보니까 정말 일어나는 일들이야. 네가 상대를 위하고 한 모든 일들이 너에게 다시 돌아오게 되어있어. 네가 남에게 돈이든 시간이든 에너지든 무엇이든 그 사람을 위한 일을 했을 때 그 반대급부가 너에게 돌아와. 그게 네가 행했던 똑같은 형태로 돌아오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의 직접적인 마음으로 돌아오거나, 너의 일상 속에서 행운으로 작용하거나, 네가 위했던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서 그것이 돌아오기도 하고. 때로는 똑같은 형태로 돌아올 수도 있겠지, 그리고 아예 네가 알아채지 못하는 방식으로 너에게 작용했을 수도 있어. 이 넓은 우주 속에서 그 법칙이 작용해. 그래서 네가 항상 남들을 생각하고 너의 행동과 말투, 눈빛. 그 모든 것들에 있어 조심해야 하는 이유야."
멍했다. 양보는 무슨, 내 이기적인 마음은 그때까지도 변함없었던 거였다. 상대를 위해서 내가 억지로 굽힌다는 잘못된 생각으로. 사실 남들을 위하는 일이 아닌 결국 나를 위하는 행동이었다. 내가 나를 위한 행동을 하면서 그게 힘들다고, 자존심 상한다고 징징대고 있었던 꼴이었다.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 나는 좀 많이 달라졌다. 남들을 대할 때 더욱 진심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우주의 법칙은 꼭 사람과의 관계에 국한되지 않았다.
일상 속에서 갑자기 횡단보도 한가운데 떨어져 있는 내 몸 만한 비닐 천막을 주워 질질 끌며 근처 쓰레기통 근처에 잘 접어 놔둘 때도, 아무도 없는 곳에서도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지내려고 했다. 부처가 아니라서 항상 좋게만 지낼 순 없으니 한낯 인간으로 비뚤어지려다가도 엄마의 말이 생각났다. 그리고 실제로 알게 모르게 나에게 좋은 일들도 많이 생겼다.
이 이야기를 한지 십 년쯤 되었나. 가끔씩 예전처럼 '이 상황에서 내가 왜 이래야 하지?' 하는 생각이 들 때면 엄마가 말했던 우주의 법칙을 떠올리곤 한다. 여전히 나는 한참 모자라고 부족하지만, 마음속 깊이 내 우주 속에서 일어날 그 모든 것들을 위해 오늘도 우주의 법칙을 떠올려 행한다.
우주의 법칙을 아세요?
2023.09.04. 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