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리 무어가 제시한 '초기 사용자 → 조기 수용자 → 초기 대중 → 후기 대중 → 말기 수용자'라는 기술 수용 곡선은 스타트업에게 교과서처럼 여겨진다.
이 곡선에는 '캐즘(Chasm)'이라 불리는 단절 지점이 있다. 조기 수용자(얼리어답터)의 열광적 반응을 얻었더라도, 그 열기를 초기 대중(전기 다수수용자)에게 전이시키지 못하면 제품은 시장에서 고립된다. 그래서 창업자들은 캐즘을 넘기 위해 빠른 시장 진입과 확장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
하지만 모든 스타트업이 반드시 이 길을 따라야 할까?
- 초기 사용자 (Early Adopters): 기술에 열광하며, 혁신에 관대하고, 아직 미완성인 제품도 기꺼이 써보는 사람들이다. 비전과 가능성에 투자한다.
- 실용주의자 (Early Majority): 제품이 안정적이고, 기존 시스템과 잘 맞고, 다른 사람들도 쓰고 있는 것을 보고 나서야 선택하는 사람들이다. 검증과 신뢰가 우선이다.
- 캐즘(Chasm): 조기 수용자(Early Adopters)와 초기 대중(Early Majority)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이다. 여기서 많은 제품이 실패하고 사라진다.
다시 질문한다. 모든 스타트업은 정말로 캐즘을 넘어야만 할까?
Trello와 Stack Overflow를 만들어 낸 조엘 스포스키(Joel Spolsky)는 2000년 5월 <Strategy Letter I: Ben and Jerry’s vs. Amazon>에서 이와 관련하여 통찰력 있는 비유를 남겼다. 그는 스타트업 방식에 두 가지 모델이 있다고 설명했다. 하나는 Ben & Jerry's 모델, 다른 하나는 Amazon 모델이다.
Ben & Jerry's 모델은 작고 느리지만 견고한 성장 전략이다. 창업자는 처음부터 시장을 점유하려는 게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고객에게 가치를 주는 것을 중시한다. 외부 투자 없이 자기 자본(때로는 신용카드 한도) 내에서 시작하여 고객의 반응을 직접 보고 점진적으로 사업을 확장한다. 수익성을 초기부터 중요시하며, 성장 속도보다는 지속가능성과 창업자의 자율성을 우선시한다. 대신 그 속도는 느리고, 커지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Ben & Jerry's는 미국의 프리미엄 아이스크림 브랜드로, 1978년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출발해 사회적 가치와 공동체 중심의 경영 철학으로 주목받았다.)
내가 좋아하는 메일침프(Mailchimp)는 이런 Ben & Jerry's 모델의 대표적인 사례다. 이메일 마케팅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 회사는 2001년 창업 후 외부 투자 없이 천천히 성장했다. 창업자 Ben Chestnut은 20년 동안 꾸준한 성장에 집중했고, 2021년 120억 달러에 Intuit에 인수될 때까지 모든 지분을 유지했다.
반대로 Amazon 모델은 규모와 속도에 모든 것을 거는 전략이다. 네트워크 효과가 중요한 시장에서 '누가 먼저 규모를 키우느냐'가 성공을 좌우한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엄청난 자금을 조달해 적자를 감수하면서도 시장 점유율을 빠르게 확대하는 데 집중한다. 수익성은 나중 일이고, 당장의 적자는 미래 시장 지배력을 위한 '성장의 연료'일 뿐이다. 이런 전략은 TAM(Total Addressable Market, 진출하려는 시장의 전체 크기)이 매우 크고, 선점 효과가 강한 시장에서 더 큰 의미가 있으며, 외부 투자자들의 자금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창업자의 자율성이 제한될 수 있다.
Uber, Airbnb, Slack 같은 스타트업들이 이런 전략을 취했다고 볼 수 있다. 초기에는 빠르게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수익성보다 성장에 모든 것을 걸었다. 다행히 이들은 결국 성공했지만, 비슷한 전략을 시도한 수많은 스타트업들이 중간에 실패했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문제는 많은 스타트업이 마음만 급해 무리하게 Amazon 모델을 좇는다는 데 있다. 제품은 아직 PMF를 넘지 못했고, 고객은 조기 수용자 단계에 머물러 있는데, 마케팅은 주류 시장을 향해 있다. 그러니까 자금이 그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전략과 현실의 괴리가 진짜 위기를 부른다.
<2023년 스타트업 실패 통계>에 따르면, 실제로 시리즈 A를 받은 스타트업 중 60%가 시리즈 B로 가지 못하고 폐업했다. 이 중 70%는 "제품-시장 적합성(Product-Market Fit)을 찾기 전에 과도한 스케일업을 시도했다"라고 답했다.
많은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간과하는 사실이 있다. '작은 시장에서의 지배력'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에 대한 부분이다. 매출 1000억 원의 거대 기업보다 매출 100억 원의 수익성 높은 기업이 창업자에게 더 많은 가치와 자유를 줄 수 있다. 실리콘밸리의 거장 폴 그레이엄(Paul Graham)은 "작은 시장에서 100%의 점유율을 가진 회사가 큰 시장에서 1%를 가진 회사보다 더 가치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 유명한 <Do Things That Don't Scale>에서 나온 말이다.)
벤처 캐피탈의 돈을 받는 순간, 스타트업의 분위기는 크게 바뀐다. 빠른 성장을 요구하고, 이는 필연적으로 캐즘을 넘어야 한다는 압박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Ben & Jerry's 방식으로 창업한 기업들은 자신만의 속도로 성장할 수 있다. <The Global Startup Ecosystem Report 2023>에 따르면, 수익성 있는 스타트업의 67%가 외부 투자 없이 시작했다.
또한, 인디해커(Indie Hackers) 커뮤니티에는 연 매출 10억 원 이상을 달성하면서도 직원 한 명 없이 운영되는 '마이크로 SaaS' 기업들이 많다. 이들은 캐즘을 넘지 않고도 창업자에게 충분한 자유와 수익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다시 한번 묻는다. 꼭 캐즘을 넘어야 할까?
내 관점은 이렇다. 나는 큰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작은 문제를 해결하여 고객 또는 사용자가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게 하고 싶다. 시장이 작아도 좋다. 사용자가 그렇게 많지 않아도 된다. 그다음 그 개수를 하나씩 늘려나가는 것, 그 자체가 지속 가능한 성장이라 믿는다. 어쩌면 그중 하나가 어느 날 더 큰 시장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의도된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결과'다.
스타트업의 성공은 캐즘을 넘어 시장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에만 있지 않다. 가치 있는 문제를 찾아 그것을 해결하는 제품을 만들고, 그 가치를 인정하는 고객들과 함께 지속 가능한 비즈니스를 구축하는 것만으로도 성공이다.
"거대한 시장을 차지하여 큰 임팩트를 낼 것인가 vs. 나만의 방식으로 작게 꾸준히 성장할 것인가" 사이의 문제가 아니다. 진짜 필요한 질문은 "나는 어떤 방식으로 고객에게 가치를 전하고 싶은가?"이다. 창업자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빠르게 성장하여 시장을 확장하고 큰 비즈니스를 하는 게 목표라면 Amazon 모델이 적합할 수 있다. 반대로 자율성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비즈니스를 운영하고 천천히 성장해도 된다면 Ben & Jerry's 모델을 고려하는 게 적합할 것이다.
어떤 모델을 선택하든 정답은 없다. 다만, '창업자에게 맞는' 선택이어야 한다. 그래서 더 고민해야 한다. 캐즘을 넘는 것이 성공이라는 잣대에서 벗어나 가치관과 철학을 잘 가다듬고 나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정의해야 한다. 그래야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