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 속의 한 조각
어렸을 적 방에서 담배를 피우던 아버지는 주말이면 환기도 시키지 않은 채 동네 만화방에서 나를 시켜 빌려 온 무협지를 읽곤 하셨다. 점심상을 차리던 어머니의 ‘아버지 모셔와’라는 말에 그 방 문을 열면 자욱한 담배 연기가 아래로 깔려 짙은 안개를 만들어 냈고, 난 그 안개를 바다 삼아 파도를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파도가 온 방을 휩쓸고 돌아 나오길 기다렸던 아버지는 내 어깨에 손을 얹고 점심식사를 위해 마루로 나오시곤 했다. 시내버스에 흡연구역이 있던 80년대 초반의 이야기이다.
그 당시 담배는 골목에서 눈치를 보며 피는, 지금의 위상과 사뭇 달랐다. 담배의 폐해에 대해 사람들이 잘 몰랐다. 거리며, 기차며, 버스며, 식당에서도 당당히 담배를 꺼내 물었고, 담배를 피우지 않던 사람들도 제지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특히 영화배우, 소설가, 시인의 프로필 사진에 담배를 물고 있는 모습이 다수 있었고, 그 사진들이 어릴 적 멋있게 보이던 시절이었다. 특히 담배를 왼손에 들고 오른손은 만년필로 원고지에 글을 쓰던 한 소설가의 흑백 사진은 내게 인상 깊게 남아 있었다. 책상 아래 드러난 포개진 맨발도.
담배에 깊게 매료당한 나는 당연하게 담배를 배웠다. 시험을 망친 나를 위로한답시고 데려간 호프집에서 친구가 한껏 내뱉던 담배연기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다. 첫 담배를 피우고 항상 내 주머니에는 점심값은 없더라고 담배값은 있었으며, 던져도 꺼지지 않는다던 라이터를 사기 위해 돈을 모으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꽤나 열심히 피어왔다.
담뱃값 인상에, 술집을 포함한 공공장소 금연에 잠시 끊을까 하는 갈등도 있었지만 결국 끊지 못했고 기껏 가족의 건강에 대한 잔소리에 전자담배로 갈아탄 지 몇 년째이다. 회사 내에서도 매년 금연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흡연자를 압박하고 있고, 자유게시판 같은 익명의 힘을 빌려 ‘출, 퇴근 버스탈 때 냄새나니 참아달라’ 거나 '도로가에 있는 흡연실의 위치를 옮겨달라' 등으로 구박을 당하기도 한다. 그나마 이 금연 열풍이 괜찮은 건 팀에서 혼자 담배를 피우니 흡연실로 가는 길에 대화가 없어서 좋다. 담배 하나 피우며 생각을 정리하거나 간단히 SNS를 열어 좋아요를 누르는 휴식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어릴 적 로망이었던 사진의 배우나 작가처럼 멋있게 피우는 건 이제는 꿈도 꾸지 못하고 흡연구역을 전전하며 굴욕적인 흡연생활을 연명하고 있다.
어느덧 담배를 피우며 글을 쓰던 작가의 나이 즈음에 이르렀다. 백발로 글을 쓰던 작가의 사진은 담배를 떠나 작가 하면 떠올리는 모습이었고, 그 시절 그런 모습의 작가가 되고 싶기도 했다. 최근 들어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온갖 잡동사니가 쌓인 작은 방을 정리하고 서재로 만들었다. 퇴근을 하고 간단히 저녁을 먹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책상 앞에 앉는다. 이젠 담배도 없고 원고지도 없지만 그 사진의 작가를 흉내 내며 써지지 않는 습작들을 써 내려가고 있다. ‘글 쓰는 모습은 지켜볼수록 아름다운 구석이 있다.’고 한다. 어설프지만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 내 모습도 아름다운 구석이 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