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만족 하고 있어!

러닝기록을 공유하는 이유

by 책사이애

아이 운동회 날이다. 규모가 작은 학교라 전교생 수가 적다. 부모님 뿐 아니라 조부모님들에 졸업생들까지 죄다 모여 마을 잔치처럼 치르는 한마음 운동회다. 아니나 다를까, 재학생이 치르는 경기 외에 부모님들이 참여해야 하는 경기가 제법 된다. 어디 가서 나서는 성향은 아니라 구경만 하고 와야지 다짐하면서도 러닝 팬츠를 입을까, 요가 레깅스를 입을까, 드라이 프리 원단의 트레이닝 복을 입을까 고민한다. 도톰한 러닝 양말을 신고 모자까지 쓰고는 거울 앞에 섰다. 아, 이건 좀 오버지. 아이 운동회에 내가 운동하러 가는 건 아니지 않아?


적당한 5부 청바지에 가벼운 티셔츠를 입고 모자는 벗었다. 운동 잘할 것 같은 인상을 풍겨 좋을 건 없지. 괜히 나섰다가 망신만 당할 텐데 절대 나서지 말자! 운동 기록을 SNS에 꾸준히 공유하면서도 운동 좋아한다는 사실을 모르길 바라는 아이러니란. 학교에 도착해 어슬렁 거리는데 친구네 가족이 눈에 띈다. 혼자라 객쩍은 마음에 슬며시 다가가니 자리를 펼 것 없이 그냥 같이 앉자고 말해 얼른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비예보가 있어 운동회 진행이 불투명했는데 다행히 바람만 셀 뿐 비는 오지 않았다. 구름이 잔뜩 끼어 스산한 기운이 돌았고 바람이 강해 제법 썰렁한 기온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겉옷을 둘렀고, 운동장에 줄을 선 아이들도 간간히 어깨를 떨며 추운 기운을 떨쳐내고 있었다. 친구 언니는 곧 잘 함께 만나 밥을 먹던 언니라 친분이 있었다. 대뜸 반바지를 입은 내 모습을 보며 "넌 운동하니까 안 추운가 보구나?"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춥지 않았다. 언니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내심 '확실히 운동을 꾸준히 하니까 몸에 열이 많이 있지' 스스로도 넘겨짚었다. 그렇게 '운동'이라는 말이 나온 이후 내가 공유하는 운동 기록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너 스토리(인스타그램) 보면서 대리만족 하잖아 내가."

몇몇 지인들이 나의 운동에 대해 한 마디씩 건네긴 했다. 자극이 된다, 나도 한번 뛰어보고 싶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잘 달릴 수 있냐 등등 각자의 입장과 처지에 따라 같은 모습도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듯했다. 물어오는 질문이나 감탄, 조언들도 제각각이었다. 너무 용쓰는 것 같아 보이니 쉬엄쉬엄 하라는 말도 들어 봤고, 그러다 정말 운동선수할 거냐는 말도 들어 봤다. 덕분에 자신도 뛰기 시작했다며 고마운 마음을 전해오기도 했고, 은근히 자신의 기록과 비교하며 나의 기록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리만족을 한다는 말은 처음 듣는 말이었고, 그것의 의미는 계속해서 곱씹어보게 되었다.


달리지는 않지만 달리는 나의 모습을 보고 누군가 만족한다? 만족을 주는 것과 또 받는 것이 어떤 맥락을 띠나? 어떤 만족인지 알 수는 없지만 누군가에게 만족을 줄 수 있다는 것 자체는 꽤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혼자서 달리든 말든 무슨 상관이랴. 그걸 왜 굳이 SNS에 공유하고 부지런히 기록하는지에 대해 어느 정도 대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달리기는 철저하게 혼자 하는 일이었지만 그것을 이야기 함으로 인해 누군가를 달리게 하거나 대리 만족을 줄 수 있는 건 결코 혼자만의 일은 아니었다. 나도 누군가의 러닝 기록을 보고 처음 러닝앱을 깔았듯이 누군가 나의 기록과 영상을 보고 러닝앱을 깔아보고, 1분을 뛰어보고, 러닝화를 사놓기만 하는 것이라도 러닝을 위해 움직일 수 있다면 그것이 내가 러닝기록을 공유하는 하나의 이유가 되지 않을까.


아빠들의 줄다리기 승부가 애매했던지 진행자가 급으로 엄마들 5명을 다급히 불러 모은다. 엄마들의 릴레이 달리기로 승부를 한번 더 가려보자는 것이다. 서너 명이 자신 있게 뛰어나갔지만 5명이 채워지지 않았다. 친구와 언니가 나를 돌아다본다. "달리기라는데? 네가 나가야지!" 0.1초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저는 단거리가 아니고 장거리라서요. 속도는 안 납니다." 거두절미 "아!" 하고는 고개를 돌리는 친구와 친구의 언니. 빠른 수긍에 오히려 민망했다.


마지막 운동회의 하이라이트, 전교생 계주! 엎치락뒤치락 모든 아이들이 힘껏 발을 구른다. 바턴을 놓쳐 속상한 아이, 온 힘을 다해 달리고 있지만 걷는 속도보다 느린 아이, 상대팀과의 간격을 줄여 관중들의 환호성을 한 몸에 받는 아이, 흙바닥에 그대로 슬라이딩해 무릎이 다 까져도 끝까지 달려내는 아이. 모든 아이들의 달리기를 보며 1분도 쉬지 않고 목이 터져라 소릴 질러댔다. "잘하고 있어! 끝까지 달려!" 양 손바닥을 동그랗게 말아 입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나의 목소리가 아이들에게 닿았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들이 다음 선수를 위해 마지막까지 뛰어가는 모습은 너무나도 커다란 환희였다. 아까 친구의 언니가 했던 말, 그 말의 의미를 비로소 짐작할 수 있었다. 대리만족, 나는 오늘 돌멩이처럼 예쁜 아이들이 온 힘을 다 해 앞으로 달려 나가는 모습을 보고 대리만족했다. 그것은 달리는 것, 그것이 주는 명징한 감동과 더할 수 없고 더할 게 없는 달리기 본연이 가진 엄청난 에너지를 온몸으로 느껴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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