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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남미녀모친 Jul 08. 2024

에어컨이 고장 났다(2).

에어컨 회고록

2023년 8월의 일기) 에어컨이 고장이 났는데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옛날이야기를 해 볼까...

  우리 집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게다가 옥상 있는 집이라 집이 많이 더워서 아빠는 옥상에 화분을 가득 식물을 키우셨다. 그리고 여름에는 아침저녁마다 옥상에 물을 뿌렸다. 가끔 옥상에 만들어 둔 평상에 모기장을 치고 별을 보며 잤다. 언뜻 생각하면 굉장히 아름다운 추억인데, 실제로 해보면 안다. 아침부터 겁나 눈부시고 더운 거... 옥상 콘크리트 바닥이 머금은 열기에 집은 늘 더웠다.


  초등학교 5학년때였나? 거실에 작은 에어컨이 달렸다. 부모님이 산건 아니고 작은아버지가 에어컨을 샀는데 사은품으로 하나 더 받았다고 했다. 드디어 우리 집에도 에어컨이 생겼다. 25평 집 거실에 7평짜리 에어컨이 달렸다. 하지만 나는 에어컨이 돌아가는 것을 몇 번 본 적이 없다. 전기세가 많이 나간다고 거의 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다 여름에 집 안에서 고기 구워 먹는 날만 잠깐 틀었었다. 온 방의 문을 모두 닫고 거실에 에어컨을 켠 채 고기를 구우면 집안에 연기가 자욱했었다.


  중학생이었던 어느 날 너무 더워서 샤워를 하루에 3번을 했더니 엄마가 샤워를 많이 한다고 뭐라고 하셨다. 그래서 그다음부터 자기 전에 한 번만 샤워했다. 엄마 덕분에 인내심이 늘었다.


  대학생이 되어 자취를 했는데 선풍기도  없었다. 나는 대프리카에 있는 학교를 다녔다. 정말 더운 날은 샤워를 하고 가만히 있었다. 더울 때는 가만히 있는 게 최고다.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 아무리 약한 바람이라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람이 내 몸의 열을 앗아가서 땀이 지나간 자리가 더 시원해진다. 그래도 더울 때는 자취방에서 편의점까지 걸어 나와서 혼자서 시원한 맥주를 한잔 했다. 대프리카의 열대야도 며칠 버티면 여름이 금방 지나가는 것 같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했는데, 자취방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엘리베이터 없는 4층 빌라 맨 꼭대기 층에 살았다. 더운 날에는 늘 그랬듯 샤워를 하고 가만히 앉아서 시원한 바람이 불기만을 기다렸다. 빌라 앞에 저수지가 있어 그래도 바람이 불 때는 시원했다.


  결혼할 때 나는 에어컨을 사지 않았다. 봄에 결혼을 했고, 한창 더운 낮에는 직장에 있었으니 퇴근하고 샤워하면 그만이었다. 더우면 또 샤워하고 욕조에 물 받아 놀았다. 다행히 남향 아파트에 통풍이 잘 되어서 며칠 열대야만 잘 보내면 여름도 견딜만했다. 그렇게 5년을 지냈다. 이쯤 되면 정말 지독하다 하겠지만 첫째를 임신했을 때도 우리 집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아이가 여름에 나오니 이번 여름 산후조리원에서 보내고, 친정에 산후조리를 하고 돌아오면 가을일테니 에어컨을 미리 살 필요가 없다는 계산을 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등이 너무 가려워서 남편에게 보여주니 땀띠라고 했다. 집에서는 괜찮았는데, 뭐가 문제인가 생각해 보니 직장에서 에너지를 절약한다고 퇴근 두 시간 전부터 에어컨을 끈 게 문제였다. 그래서  만삭의 내가 너무 더웠던 거다. 집에서는 편하게 입고 샤워하면 땀은 덜났는데 말이다. 출산 휴가에 들어가자 땀띠는 곧 사라졌다. 첫째는 한여름에 낳았다. 친정에서 산후조리를 두 달 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가을이었다. 가을이니 에어컨은 필요치 않았다. 역시 내 계산이 맞았다.


  다음 해 초여름 6월쯤이었나... 아이가 가려워서 하는 것을 보고 나는 모기에 물려서 그런가 싶다가 아이의 등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땀띠였다. 아직 땀띠가 날만큼 덥지 않은데... 남편에게 이 상황을 말했다. 내가 둘째를 임신 중이라 여름을 나기 위해서는 에어컨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드디어, 에어컨을 설치했다. 내 생애 두 번째 에어컨이다. 다만 조금 다른 것이 지금 우리 집에 있는 에어컨은 남편의 형이 결혼할 때 산 에어컨이다. 맞다. 중고다. 2009년식이니 15 years old 되었다. 에어컨은 큰 집에서 3번, 우리 집에서 2번 이사를 다녔다.

그 에어컨이 고장이 난 거다. 15년 된 에어컨이면 한참 사춘기라 예민할 때이긴 하다.

그동안 잘 버텨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는데,

미워해서 미안하다.


예전에 에어컨이 없을 때는 땀이 나도 괜찮았는데, 에어컨에 익숙해진 지금 땀이 나면 예민해진다. 나 원래 그런 성격 아닌데, 에어컨 몇 년 써 보더니 사람이 변했다(아직도 에어컨 탓이라고 생각해?). 땀과 더위에 익숙해지려고 한다. 그래야 불어오는 바람이 더 반가울 것 같다. 여름에 아침 일찍 운동할 때 땀 흘린 자리를 시원하게 채워주는 바람이 참 좋다.

그나저나


에어컨 기사님, 언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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