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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사 Jan 09. 2024

중화상가

바통 넘기듯 이어지는 철거의 역사

1992년의 가을날, 격렬한 항의와 투쟁을 무릅쓰고 타이베이 중심가에 위치한 '중화상가'라 불리는 8개동의 상가가 공권력에 의해 철거에 들어갔다. '샹젤리제 거리 비전', '눈과 마음을 정화하는 녹화 사업', '국제 도시로 나아가는 타이베이의 지표'라는 황다저우(黃大洲) 타이베이시장의 화려한 구호 아래 이는 이루어졌다.


서울 세운상가

슬럼을 정리하자


세운상가 (2023년 12월)

타이베이에서 잠시 서울을 떠올려 본다. 서울 도심에서 유명한 건축물이야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이번 글에서는 잠시 세운상가를 위시로 일렬로 선 8개동의 상가아파트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본다.


6.25전쟁 이후 서울 종로3가 일대에는 수많은 피난민들이 몰려와 자리를 잡았다. 무허가 판잣집들이 들어서며 거대한 슬럼이 형성되었다. 


이것이 골칫거리였던 김현옥 서울시장은 이 일대를 불도저처럼 밀어버리고자 하였다. 그렇게 건설 계획과 시공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어, 1968년 각각 세운, 현대, 청계, 대림, 삼풍, 풍전, 진양이라는 이름을 지닌 8개동의 상가들이 일렬로 지어졌으며, 이를 통틀어 세운상가라고도 부른다. 남북으로 긴 상가가 도심 한가운데 만리장성마냥 서 있는 독특한 모습은 신기함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세운상가와 역사와 형태가 판박이같이 유사한 곳이 타이베이에 있단다. 슬럼을 정리하며 형성되었다는 역사와, 여러 동이 장벽처럼 일렬로 서 있다는 유사점을 지녔다. 다만 세운상가와 달리 앞서 언급하였듯 철거되었지만 말이다. 여러모로 닮은 도시인 서울과 타이베이, 두 도시의 교집합으로 발걸음을 옮겨 보자.


중화상가의 건설과 부흥

도시의 종양이 소비의 중심이 되다


타이베이성 북문 (2024년 1월)

그 이름인즉슨 '중화상가'일지라. 서울에 한양도성이 있듯 이곳에는 타이베이부성(臺北府城)이라는 이름의 성이 있었단다. 이후 그 자리에 철도와 도로가 건설되며 성벽은 현재 남아있지 않고, 타이베이역 부근의 '승은문(承恩門)'을 비롯한 일부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대한민국과 중화민국. 이름도 유사한 두 나라에는 유사한 양상의 전쟁 또한 일어났다. 광활한 중국 대륙을 통치하던 중화민국은 '국공내전'이라 불리는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참패하여 중국 대륙을 상실하고 대만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퇴각한 정부와 함께 군인들을 비롯한 주민들도 몰려들었는데, 이들은 마땅한 거처를 찾지 못해 도로와 철도변에 무허가 판자촌을 이루어 살았다. 열악한 생활 환경, 위생 및 치안 문제로 이곳은 '도시의 종양'이라고 불렸다. 그런 슬럼이 급변을 맞은 것은 다름 아닌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의 시찰. 질서 잡히지 못한 모습을 본 장제스는 각종 관료들을 끌어 모았고, 황치루이 타이베이시장을 중심으로 '중화상가 건설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이후 판자촌의 전면적 철거가 진행되고, 1961년 여덟 개 동이 일렬로 이어진 중화상가가 완공되었다. 세운상가와도 비슷하나, 시기는 중화상가가 앞선다. 유교 사상에는 핵심가치인 사유팔덕(四維八德)이 있는데, 그 중 팔덕인 충(忠), 효(孝), 인(仁), 애(愛), 신(信), 의(義), 화(和), 평(平)이 중화상가 각 동에 이름 붙여졌다.

중화상가 (1983년)

행인들은 바쁘게 걸음을 옮기고 전자, 의류, 식품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 상점들과 이름 날리는 식당들이 불을 밝히며, 밤에는 유명 브랜드의 간판이 번쩍였단다. 왕즈훙 저의 '저항의 도시 타이베이를 걷다'에서 언급된 중화상가에 대한 묘사이다. 당시 중화상가의 사진을 찾아본다면 화려했던 과거를 엿볼 수 있다. 



타이베이 철도 지하화 사업

대동맥을 들어 옮기는 삼십 년의 대역사


타이베이역 (2024년 1월)

한국에서도 도심을 지나는 지상 철도를 지하화하자는 의견이 종종 나오곤 한다. 그러나 현실적인 이유로 이것이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못하고 있는 가운데, 타이베이는 이를 실행에 옮겼다. 위성 지도로 타이베이역 일대를 바라보면, 거대한 역사는 보이나 주변으로 뻗어나가는 선로는 보이지 않는다. 모두 지하화되었기 때문이다. 직접 방문해 보면 타이베이역 승강장도 지하에 위치해있음을 알 수 있다.

국립대만박물관 철도부원구 (2024년 1월)

1979년, 중화민국 행정원은 타이베이 지역 철도의 지하화를 결정하였다. 지방 정부를 거치지 않고 중앙 정부가 직속으로 이를 결정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심각하고 시급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도로 교통에 있어 철도 건널목은 교통 체증을 일으키는 주 원인이다. 특히나 타이베이역은 대만 제일의 간선 철도 노선상에 위치한 역으로써 철도 교통량도 많았을 터이니. 이후 1983년 중화민국 교통부 산하에 철도 지하화 관련 기구가 설치되며 공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2011년 쑹산(松山)-난강(南港) 구간의 지하화가 완료되며 대역사는 장장 삼십 년 만에 비로소 막을 내렸다.

국립대만박물관 철도부원구 (2024년 1월)

타이베이역 앞 과거 철도국 청사로 쓰이던 건물에는 철도박물관이 들어섰다. 철도박물관에서는 지하화 이전 타이베이역의 모습을 재현해놓은 모형을 볼 수 있었다. 


중화상가의 해체

바통 넘기듯 이어지는 철거의 역사


화려했던 중화상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철길, 상가, 도로가 나란히 있었던 자리에는 넓은 신작로가 들어섰다. 타이베이 동부가 급부상하며 중심축도 옮겨갔다. 자연스럽게 중화상가의 상권은 쇠퇴하였고 또 다시 '도시의 종양'이 된 것이다. 1992년 황다저우 타이베이시장은 철거를 명령하고, 강제 집행이 개시되었다.

중화로 (2024년 1월)

성벽을 허물고 도로와 철도가 지어졌다. 그 일대에 형성된 판자촌을 철거하며 중화상가가 지어졌고, 중화상가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는 확장된 도로가 들어섰다. 끊임없는 철거의 연속이다. 마치 바통 넘기듯 철거의 역사가 이어졌다. 지금의 도로에는 반복되었던 철거의 역사가 지층처럼 묻혀 있을 것이다. 


시먼딩

중화상가가 없어진 자리에는


시먼종합상업빌딩 (2024년 1월)

중화로(中華路)를 따라 시먼딩(西門町)으로 향했다. 거대한 크기의 솔라리아 니시테츠 호텔 (索拉利亞西鐵大飯店)이 가리고 있는 한켠에는 계단이 노출된 이색적인 건축물이 보였다. 현지인들에게 어떻든, 새로운 장소에서 이색적인 풍경을 맞닥뜨렸을때 솟아오르는 것은 생경함이다. 특히 공간 기록자들에게는 사진기를 꺼내고 싶은 격한 마음이 생겨나고, 결국 한 장의 사진을 남겼다.


시먼딩 거리에 들어섰다. 눈으로는 일본의 애니메이션이 들어오고 귀로는 한국의 아이돌 가요가 들어온다. 대중문화가 타국에 잠식된 것은 어떤 느낌일까.


최신 문화를 향유하는 'MZ세대'들이 번화가를 점령한 모습은 대만도 역시인 것 같다. 그런 현지인과 더불어 이방인으로써 타이베이를 느끼고 있는 행자들이 어우러져 시먼딩 거리는 불야성을 이루었다. 


혹자는 중화상가의 철거가 침체되었던 이곳 상권의 중흥을 이끌었다고 말한다. 아마도 시대에 뒤떨어진 지역으로 외면받던 중화상가라는 존재가 사라짐으로써 젋은이들의 집결지로 다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는 말 아닐까. 이방인인 내가 타이베이 시민도 모를 이야기를 알 도리는 없으니, 생각만 해보는 것이지만 말이다.


마치며


국립대만박물관 철도부원구 (2024년 1월)

중화상가는 사라졌지만, 앞서 언급한 철도박물관에서는 일부분이 재현된 모형으로나마 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다 한 것 같아, 중화상가를 기억하고 있는 곳이 있음을 알려주는 사진 한 장으로 끝맺기로 하였다. 발로 걸은 화려한 거리 시먼딩에서, 자판을 두드리는 한적한 전철역 완화역에서 글을 마친다.


공간기록

살아가는 공간에서 가치를 찾고, 그 유산들을 기록해나갑니다.


글 철사

사진 철사


작성자가 직접 촬영한 사진은 출처 표기 하에 자유롭게 인용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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