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탈리스트>
목적지만이 전부라면 그 길고 긴 엔딩 크레딧도 필요 없었을 것을.
그 아이러니가 사선으로 비뚤게 흘러간다.
경쾌한 음악의 끝에 칠흑같은 적막을 남기며.
이 영화는 (뒤집어진 자유의 여신상으로 시작하여 뒤집어진 십자가로 끝맺어지는), 한쌍의 괄호에 담긴 이방인의 피, 땀, 눈물을 장대한 시간을 통해 보여준다. 어찌 보면 너무나 많이 다루어졌던 이야기일 수도 있는 유대인, 근현대 미국의 이방인 서사를 이러한 방식으로 풀어냈다는 것이 놀랍다. 괄호의 바깥, 그 에필로그에서야 꽃을 피워낸 그의 아메리칸드림은 목적지에 도달하였기에 그걸로 만족스러운 것일까. 상처투성이였던 모든 과정은 그저 괜찮아진 것일까. 휠체어에 앉아 쓰게 웃는 그의 모습과, 고통스러웠던 한평생의 과정을 괄호쳐서 지우고 싶은 듯 타인의 입을 빌어 던지는 메시지는 경쾌함 뒤 애달픈 적막을 남긴다.
주인공인 '라즐로 토스'는 미국에 가서 자신의 모든 본질을 시험당한다. 발음, 생김새나 선호, 태생과 종교적 신념까지. 미국의 자본가들, 백인 사회의 꼭대기인 청교도들은 그의 모든 것이 부정 당해 마땅한 것으로 합의한다. 울타리 속에 발을 걸치고 있다고 한들, 울타리 밖에 나가 있는 그의 일부는 배척하기에 충분한 명분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그에 대한, 그들에 대한 핍박과 착취는 숨을 쉬듯 자연스러운 것으로 자리 잡는다.
우리는 비단 민족과 같은 큰 범주의 것이 아니더라도 사회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본질을 시험당한다. 또 훼손당한다. 새로운 조직에 들어가고, 새로운 장소를 마주하고, 새로운 시절에 다다를 때마다 이방인으로서 고통받는다. 자신의 견고한 본질을 유지하는 삶이란 가능할까. 우린 언제나 너무도 비싼 값을 치르며 우리 스스로를 학대하는 틈바구니에 기꺼이 몸을 내던진다. 그곳에 더 나은 삶이 있을 것이라는 이상을 품고. 하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것 자체를 부정당하던 전란의 암운 속에서 살아남아 날아온 낯선 땅에도 낙원은 없다. 다른 방식으로 부정당할 뿐이다.
미국에서 유대인으로서의 자아를 찾지 못해 입을 다물던 조피아는 예루살렘을 향하고서야 말을 튼다. 1부에서 라즐로가 아내를 찾아 헤매며 미국에서 유럽으로 던진 편지의 방향성은 2부로 넘어와서는 미국에서 유대인의 본질 그 자체인 예루살렘으로 역전된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의 견고한 본질이 침식되는 과정 속에서 지리한 방향의 역전을 반복한다.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 대한 부단한 노력과 뒤따르는 회의감의 폭풍 속에서 길치가 되어버린다.
그는 그 휘몰아치는 폭풍우를 뚫고 자신의 예술품으로 자신의 견고한 본질을 승화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자본주의의 성으로 향하는 와중에 자그마한 오두막 문을 거치며 자신의 것을 계속 내려놓아야만 했다. 전란에서 자신의 힘으로 설 두 다리를 잃은 아내와 자본주의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품을 잃어가는 둘이서 서로 쾌락으로 달랠 수밖에 없었다. 견딜 수 없는 것이었으니. 약에 취해서 죽음의 경계선을 오락가락하고, 자신의 순결마저 빼앗겨 벤 뷰런의 말처럼 자본 앞에 한없이 약해지는 길거리의 그것이 될 수 밖에는 없었다. 마치 자신이 전란 속에서 사고팔았던 누군가의 인간성과 같이 말이다.
그곳에서 벗어나고자 헤어질 결심을 하고 자신의 훼손된 본질을 부여잡고서야 그들은 묻어두었던 말을 쏟아낸다. 내내 휠체어로 타인에게 몸을 맡기던 아내가 자신의 두 다리로 간신히 서서 부르짖는 외침이 바로 그것이다. 주변의 농담 찌끄래기 속 배경음이 되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말을 분출함으로써 그들은 자신이 훼손되기를 거부한다. 거부하였지만 그것으로 해피엔딩은 분명 아니다. 뒤집힌 십자가란 그들의 잉여스러운 후일담도 그다지 평탄하지만은 않았을 것을 암시한다.
라즐로 자신은 끔찍하다고 여기는 인생의 과정 속에서, 그의 삶에도 고마움이 중간중간 스며들어있다는 것도 이 영화의 아름다움이다. 자신의 집에서 얹혀살며 아내에게 추파를 던졌다는 오해를 산 인간을 저렇게 젠틀하게 보내줄 주변인이 있다니. 또 그의 공을 가로채지 않고 소개하기를 거리끼지 않다니. 자신이 약으로 스스로를 학대하는 모습을 보일 때 올바른 길을 제시해 주는 친구가 주변에 있다니. 고통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인생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그를 품어주는 이들이 존재할 수 있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목적지에 도착한 영화는 주인공의 뜻에 따라 과정을 거부하지만, 그 끝에는 엔딩크레딧이라는 영화의 과정더미를 물에 떠내려 보내듯 흘린다. 과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목적지가 중요한 것이라면 그것들은 실상 필요 없는 것임이 자명한, 그런 것들. 하지만 절대로 괄호 쳐서 지워버릴 수 없는 고통의 흔적들. 라즐로가 작은 평방에서 하늘만 바라보며 희망을 찾듯 미처 아래에서 위로 올리지는 못하고, 사선으로 비뚤어져 지나치는 그 모습들을 보자면 구슬픈 감정이 남는다. 함께 흐르는 음악처럼 경쾌하지만 그 끝은 너무나도 깊은 적막을 남긴다. 그 상흔에 대한 조명이 이 영화의 시작이자 끝이다.
이 영화가 시네마의 본질이라고 하는 말에 동의하는 이유는, 내가 영화관이 아니었다면 이 영화를 절대 인터미션을 지켜가며 집중해서 보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다. 암전된 공간 안에서 오로지 한 사람의 장대하고, 누군가에게는 지루할 수도 있을 그 창작된 인생을 오롯이 집중해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영화의 가치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