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아쉬탕가
일본을 좋아하니까. 혼자 가는 여행이어도 이틀이면 충분히 재밌게 즐기고 있겠지? 생각했던 내 예상과는 다르게 늦겨울의 삿포로는 '이런 날씨엔 여기 오는 거 아니란다'라고 알려주듯. 낮에는 조금 품어주다가도 오후만 되면 같이 덮던 담요를 훽 뺏어가 버린다. 매정하게 나를 내친다. 그래도 엊그제부터 묵고 있는 게스트 하우스 사장님 (요시에상)이 잘 잤냐, 아침 먹을래? 다녀왔니? 물어봐주시는 덕분에 그나마 외로움에 지지 않고 간신히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 깔끔한 호텔방에 묵지 않고 이틀 연속 이곳을 선택한 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 씬. 훨- 씬 잘한 선택이었다.
오늘은 새벽부터 서둘러 갈 곳이 있다. 바로 [Ashtanga Yoga Sapporo] 요가원. 일본 여행 중에도 여행지 근처에 아쉬탕가 요가원이 있으면 하루라도 가보려고 하는 편인데 마침 삿포로에도 아쉬탕가 요가원이 있었다. 내가 수련하는 '아쉬탕가' 요가는 정해진 시퀀스를 반복하는. 스스로 수련하는 방식 (지칭: mysore)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선생님의 큐잉을 들을 필요가 없다. (선생님은 내가 수련하는 모습을 지켜보시다가 다음 동작을 할 수 있는 몸 상태가 된 것 같을 때 다음 진도를 내주신다) 즉 말이 통하지 않아도 전 세계 어디에서 수련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새벽 수련시간에 맞추려면 5시에 일어나 채비를 해야 하는데 두꺼운 이불 밖으로 나오기가 너무 힘들었지만 수련 후엔 분명 '하길 잘했다' 뿌듯해할 걸 알기에. 그 느낌만 생각하며 나갈 준비를 했다.
am 06:05
그냥 이대로 로비에 잠깐 앉아있다가 두꺼운 이불속으로 다시 들어가 버릴까... 뇌가 나가지 말라고 온갖 핑계를 다 붙여댔으나 이럴 때는 이런 생각을 떠올리는 뇌에게 씨게 욕을 박아준다.
닥쳐라 나갈 거니까.
눈을 밟으면 신발이 젖어버리고, 안 밟고 피해 걷자니 차도다. 너무 이른 시각이라 길거리에 아무도 없을까 걱정했는데 그래도 도시는 도시인지라 차가 몇 대씩 다녔다. 역시 막상 상황을 맞닥뜨리면 걱정했던 것보다는 별 거 아닌 경우가 많아.
육교를 건넌다. 계단의 간격이 너무 낮아 두 개를 밟기엔 애매하고 세 개를 밟자니 약간 힘들다. 결국 만들어진 대로 한 계단씩 종종걸음으로 올라와 보니 허름한 건물 몇 개가 보이고 물살 튀기며 지나가는 자동차. 바쁘게 역으로 걸어가는 사람. 잠옷 차림으로 나와 집 앞 을 쓸다 하품하는 모습이 풍경처럼 다가온다. 누군가에겐 재미없는 일상이 관찰자의 눈으로 들어오면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고 가끔은 그림 같다.
요가원 가는 길목.
일본 골목은 정말이지 너무 깨끗해. 심지어 이렇게 똥눈이 뒤범벅되는 시기인데도.
녹은 게 이 정도면, 한창 내릴 땐 어느 정도였을까?
주차장이 안보인다. 눈오기전 저자리는 분명 주차장이였을 거다.... 삿포로... 정말 눈의 민족인 걸로..
얼었다 녹았다 반복하니 도로 상태도 좋지 않다.
드디어 도착. 미리 방문할 거라는 DM을 보내놨었는데
엥. 문이 너무 굳게 닫혀있어 당황.
이럴 땐 문을 열어보는 게 맞나? 아니면 다시 DM을?
당연한 행동도 일본에선 괜히.. 이거 민폐일까?
싶어 쭈뼛대게 된다.
조심히 입구문은 열었으나 터-엉 비어있는 요가원.
도.. 돌아가.. 야하나..... 뻐...ㄹ쭘해... 선생님이 안 계시는 요가원이 어딨 냐고요.....
....라고 생각하면서 여기저기 인증샷 박고 있는 와중 선생님이 나오셨다.
일단 아무도 안 와서 덩그러니 혼자 있는 상황.. '이게 맞나?.... 이렇게 갈아입고 그냥 나가면 되는 건가?' 민망과 뻘쭘 불안이 혼동된 표정 그대로의 나..
... 의 우려와 달리 금새 수련하시는 분들로 채워졌다.
요가원 위치가 삿포로 중심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수련하시는 분들이 이렇게 많다니. 아쉬탕가 만세네.
역시 새벽에 오길 잘했어. 이렇게 다 같이 움직이며 뱉어내는 숨으로 공간이 채워치고. 채워진 공기가 다시 내 숨으로 들어와 정신을 맑게 한다. 1시간 반 정도 수련 후 수련비를 결제하려고 하니 한국 어디에서 수련하고 있냐 물으신다. 아쉬탕가 공인 선생님들은 인도에서 같이 수련을 하셔서 그런지 연결된 듯 서로 잘 아시는 거 같다. 역시나 내가 다니는 요가원 이름을 말하니 선생님들 이름을 꺼내시며 잘 지내시냐 묻는다. 이래서. 내가 모르는 요가원에 가더라도, 행동을 조심할 수밖에 없다. 선생님이 누구냐 하면 다 연결되어 알게 되니까.
혹시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모든 현상에 '왜?'라는 질문을 갖다 붙이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좀 그런 편이다.
아니 그런 편이'였다'. 'ㅇㅇ해야 돼'라는 지시가 내려지면 바로 '왜?'라고 뇌가 반문한다. 그냥 그렇게 태어났다. 그걸 왜 하는지 납득이 돼야 움직일 수 있었다. '미안해' 사과 보다 '왜'그런 잘못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는지. 경위가 더 중요하다. 누군가는 부연 설명은 핑계일 뿐이니 사과만 하라는 사람도 있던데. 나는 정반대다. 성향이 이래서 학생 때도, 회사 다닐 때도 이 물음에 대한 답이 막힐 때마다 힘들었는데. 이런 내가 아쉬탕가에 빠지다니. 아쉬탕가야 말로 정해진 '규칙' 안에서 매일 그 동작을 '반복' 하는. 선생님이 다음 동작을 허락하기 전까진 기약 없이 배운 데까지만 해야 하는 통제의 느낌이 강한 요간데 말이다. 요가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편에서 자세히 풀겠지만, 아쉬탕가를 하면서 내가 갖고 있던 세계의 껍질이 뒤집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태껏 나는 '왜'라는 질문을 함으로써 남들이 제시하지 않는 새로운 방향을 탐구하는 신선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사실은 내가 보고 싶은 면만 기대하는. 생각하기 싫은 거는 그냥 외면해버리는 사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지점에 대해서는 요만큼도 수용해 볼 마음이 없던 지금보다 더 좁은 세계에 살던 사람이었다는 걸 __ 요가를 하면서 알게 됐다. 아무리 하찮은 현상이라도 이 광활한 우주에서 벌어지는 일 중 아무 이유 없이 생기는 일은 없다. 내 무식한 머리로 그걸 받아들이지 못해 왜왜 거리며 씩씩댈 뿐이었지.
수련실 앞 가지런히 놓여있는 신발. 잘 정돈된 물건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화된다.. 이제 아침 먹으러 숙소로 돌아가볼까나.
히라기시의 신축 고층 맨션들. 이렇게 높게 지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높다. 워낙 낮은 건물만 봐왔어서 하늘로 쭉쭉 뻗은 건물이 낯서네. 아 맞다, 지난밤 요시에가 여기는 그나마 지진 피해가 없는 편이라고 했는데. 역시 그 말이 맞나 보다. 근데 어찌 새 건물이라 해도 한국에 잘빠진 투룸 건물보다 자재가 못한 거 같다. 이게 최선이냐?
주차장 널찍한 편의점은 확실히 장점이고.
쩍쩍 갈라진 도보가 위태로워 보이지만. 그래도 뭐. 내가 좋아하는 요가원도 있겠다. 지진도 '그나마' 덜하겠다, 조용하고 한적한데 삿포로랑도 멀지 않고. 이도시 꽤 맘에 든다.
숙소로 돌아와 편의점에서 사 온 탄수화물을 먹었다. 요시에상이 왜 계속 콤비니 음식만 먹냐고 물었다. 주변 맛집을 몰라서 그런 거면 본인이 추천해 줄 테니 뭐 좋아하냐고. 푸핫. 저는 진짜 편의점 음식을 좋아해서 먹는 거라고 하니 이해 안 된다는 눈빛을 보낸다. 님 몰라서 그래요 이 입맛이 얼마나 생활하기 편한 입맛인데. 음식에 대한 기대치를 최저로 낮춰놓은 입맛이라 웬만해선 만족하고 맛있게 먹을 수 있답니다?
다음에 올 땐 더 유창해진 일본어 실력을 가지고. 남편도 데려 오겠단 약속을 하고 체크아웃을 했다.
아. 우리 정말 꼭 다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