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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지훈 Aug 09. 2024

2024.8.5~2024.8.9 독서목록

읽는 즐거움

남한산성, 김훈 저, 학고재출판
척과 주 사이


업이 사라진 자리를 나태가 채웠다. 바지런해도 모자랄 판국에 있는 힘껏 게으름을 부렸다. 맑으면 맑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이유를 대며 활자를 멀리했다. 게으름을 떨쳐내기 위해 뭐라도 해야 했다. 공부 안 하는 학생이 책상 정리에 열을 올린다고 했던가. 비슷한 이치로 먼지 쌓인 책을 정리했다. 책더미 한참 아래 깔려 있던 남한산성을 발견한 계기다.


읽는 동안 '역시 김훈이다'라는 감탄이 나온다. 430페이지 분량을 한 시간 반 만에 읽었다. 속독보다는 문장력이 탁월한 덕이다. 병자호란. 한국사를 공부했다면 기시감이 드는 이름이다. 병자년에 오랑캐가 난을 일으켰다는 뜻이다. 말이 좋아 난이다. 임진년 왜란과 비교하면 특히 그렇다. 그만큼 병자호란은 조선에게 어지간히도 굴욕적인 일이었다.


패권은 한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그 거취를 기록한 결과가 역사다. 17세기 중화 패권은 후금에게 흘렀다. 조선은 운 나쁘게 파장 가장자리에 있었다. 김훈은 몇 인물을 비중 있게 다룬다. 여러 인물이 있지만 조선 측에선 인조와 김상헌, 최명길이었다. 김상헌은 청과 대립을 주장하는 척화파, 최명길은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파다. 두 당론 사이 두 달간 인조는 쉬이 결단하지 못한다.


읽는 내내 두 대의 사이 무엇이 더 옳은지 저울질을 멈출 수 없다. 결말을 앎에도 서사가 재밌는 이유다. 책은 끝났고 현실로 돌아온다. 신문을 다시 집어드니 머리가 아프다. 사람을 위한다면서도 잇속 챙기기에 몰두하는 추태가 지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한술 더 떠서 무게를 잊은 결정권자는 기울어진 생각을 감추지도 않는다. 김상헌과 최명길은 말년에 선양 옥중에서 만났고, 서로 심중에 애국을 품고 있음을 보곤 화합했다. 격변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갈등은 필수다. 작가는 펜 끝으로 외친다. 그럼에도 '본질만큼은 같아야 한다.'라고.


연필로 쓰기, 김훈 저, 문학동네출판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글*이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요샛말로 ’~며든다‘는 표현이 있다. 빠져든다는 뜻이다. 말이 재밌다. 옛 속담에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말이 있다. 보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통상 나쁜 환경에 있으면 모르는 새에 물들어버린다는 의미다. 그러나 구습에 얽매지 않는 젊은이 생각은 다르다. 매사 당당한 만큼 생활양식에 밴 습관조차 나쁘게 여기지 않는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이지만, 그만큼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도 변했다 싶다.


요사이 김훈에 스며들었다. 좀 더 줄여 ’훈며들었다‘고 하는 게 보기엔 더 마뜩하겠다. 하얼빈, 현의노래, 공터에서, 남한산성까지. 한 달 남짓 동안 칼의 노래만 빼면 유명한 소설은 거진 다 봤다. 익힌 음식만 먹다 보면 때론 생식이 당길 때가 있다. 의도치 않게 수필집을 꺼내든 것도 비슷한 이치였으리라.


’나는 내 연필이 구석기 사내의 주먹도끼, 대장장이의 망치, 뱃사공의 노를 닮기를 바란다.‘ 책 맨 앞에 쓰인 글이다. 글쓰기를 업으로 삼는다면 가슴 한 구석에 깊이 새겨야 할 문구다. 문득 그동안 김훈 소설에서 대장장이가, 뱃사공이 등장한 이유를 알겠다. 역사라는 큰 소용돌이 속에서 묵묵히 삶을 살아내는 존재들. 어쩌면 그런 삶이야말로 연로한 소설가가 바라던 이상향이 아니었을까.


회사에서 김성윤 아나운서를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지천명을 넘긴 여걸은 공사석을 넘어 한결같았다. 그 모습에서 세월로 쌓아올린 관록을 봤다. 책에서 같은 모습이 보인다. 젊고 늙음은 중요치 않다. 이상을 품은 사람은 늙지 않는다. ’쉬운 글을 쓰고 싶다.‘, ’변치 않는 목소리를 내고 싶다.‘ 언론인으로서 내가 품은 이상이다. 젊은이는 오늗도 먼저 간 발자취를 좇는다.


성의 역사, 미셸 푸코 저, 나남출판
성(性)을 금기하는 이유


대학교 3학년, 겨울. 애니메이션영상학을 배우던 나는 제작 대신 주제의식 분석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러다 내 생각에 관심을 보이는 교양 교수를 만났다. 기회를 보다 수업이 끝나고 잠시 대화를 청했다. 30분. 깊은 대화를 나누기에는 시간이 짧았다. 교수는 대화를 갈무리하며 책 세 권을 추천했다. 그날 미셸 푸코를 처음 만났다.


푸코는 세상이 위계로 이뤄졌다고 주장한다. '지구 평평론'만큼이나 허무맹랑하다. 그렇다고 주장이 허황하진 않다. 미셸 푸코는 감옥과 학교가 본질적으로 같은 이유가 개인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려는 출발점을 공유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기성 세대 시절에 완성된 교육 시스템을 떠올리면 맞는 말이다.


어쩌다 이런 결론이 나왔나. 이쯤 되면 궁금하다. 푸코가 쓴 첫 번째 책은 <성의 역사> 시리즈였다. 성(性)은 마음 심 자에 살 생자를 합친 한자다. 글자로 봐도 생명은 성(性)과 떨어질 수 없다. 푸코는 거기서부터 출발했다. '생명이 성에서 출발하는데 우리는 왜 성을 멀리하는가?' 유럽은 사회 혁명기, 빅토리아 시대, 68혁명기를 지났다. 시대별로 분위기가 다르다면, 위계 압력도 다르게 작용했겠다 생각하는 편이 합리적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형을 결정하던 권력은 성문화에 개입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틀었다. 푸코는 부르주아지 계층이 현대 성 엄숙주의를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성 엄숙주의는 아랫것들이 계층사회에 편승하지 못하게 하려는 장치였던 셈이다. 19세기 문화는 현대 사회에도 여전하다. 읽고 나니 왜 현대 사회가 성 문제로 몸살을 잃는지 알겠다. 정답이 없으니 일진일퇴를 반복할 밖에. 역시 책 속에 답이 있다.



제국의 몰락, 엠마뉘엘 토드 저, 까치출판
21세기 명-청 교체기


지난달 세계가 시끄러웠다.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이란, 프랑스, 영국 정권 교체 등. 굵직한 이변이 계속됐다. 소식이 쏟아지니 식자들도 바빴다. 기사로, 사설로 각자 생각한 바를 쏟아냈다. 좋은 글을 많이 읽을 수 있어 즐거웠다. 열심히 보다 재밌는 부분을 발견했다. 모든 글에 ’미국이 예전만 못하다‘는 소리가 빠지지 않았다. 여러 기사 가운데 맘에 드는 글을 추리다 <제국의 몰락>을 만났다.


세계는 20년 전에도 시끄러웠다. 소련 붕괴, 중국 경제 성장, 9.11테러, 유럽연합과 NATO 확장 등 굵직한 이변이 계속됐다. 50년 전 국력만 생각하던 미국이 예전만 못한 현실을 마주한 것도 그때쯤이다. 당황한 미국은 사태 파악에 나섰다. 저자 엠마뉘엘 토드가 본 현실은 ’몰락‘이란 제목을 붙일 만큼 충격적이었다.


현실을 똑바로 마주하긴 힘들다. 당시 미국은 중동에서 보이지 않는 적에게 총을 쐈고, 독일과 일본은 경제 독립을 꿈꿨다. 러시아는 혼란스러웠고 영국은 유럽과 미국 사이에서 고민했다. 책 말미에서 엠마뉘엘 토드는 미래가 예고한 현실과 다를 수 있다며 판단을 유보했다. 20년이 흘렀다. 미국은 중동 패권 장악에 실패했고, 세계 경제는 각자도생을 시도한다. 러시아엔 차르가 돌아왔고, 영국은 지금까지도 신구세계 사이 외줄타기를 계속한다. 이쯤 되니 토드가 쓴 글이 보고서라기보단 예언서라는 생각이 든다.


경제부터 안보까지. 한반도를 둘러싼 압박이 계속된다. 세계도 다시 블록 경제 시절로 돌아간다. 모르는 새 세상은 ’자력갱생‘을 요구한다. 병자호란이 떠오른다. 대의만 좇던 조선은 후발 주자 청나라에 덜미를 잡혔고 삼전도에서 굴욕을 당했다. 역사는 이념에 천착하다 파국을 초래한 인조보다 명-청 사이 실리를 추구하던 광해를 더 높이 평가한다. 답이 나왔다. 고루한 이데올로기를 버리고 실리를 우선할 때다.


지적인 사람들을 위한 보수주의 안내서, 러셀 커크 저, 지식노마드출판
보수란 무엇인가?


조선과 대한민국은 닮았다. 조선이 성리학을 따라 '공자왈', '맹자왈' 하며 싸웠다면, 대한민국은 이념을 따라 '보수왈', '진보왈' 하며 산다. 공자는 예(禮)를 정하지 않았다. 그저 인(仁)에 이르기 위한 방법으로 설명할 뿐이다. 그런데 사대부는 예(禮)를 둘러싸곤 '노론'이니 '소론'이니 하며 갈라서선 수백 년 치정싸움을 벌였다. 이념도 똑같다. 머물면 보수요, 바꾸면 진보다. 그런데 정치판에선 간단한 정의를 모르는 듯 연일 '수구꼴통', '빨갱이' 소리로 시끄럽다.


다들 진보는 잘 안다. 이 땅에서 진보는 불평등을 줄이는 개념이다. 그런데 보수는 모른다. 지킬 보(保) 자에 지킬 수(守)자를 쓰니까 현 상황을 유지하는 뜻이리라 추측할 뿐이다. 의미도 부정적이다. 진보를 욕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보수주의는 정반대다. 정치에선 '태극기 부대'를 생활에선 '꼰대'를 떠오르게 한다. 상황이 이러니 대한민국 기성세대는 '보수‘가 될까 두렵다.


1950년대 미국 상황도 비슷했다. 당시 보수를 설명하려는 노력이 많았던 이유다. <지적인 사람을을 위한 보수주의 안내서>도 비슷한 이유로 세상에 나왔다. 러셀 커크는 보수 이상향을 '개인이 사회에 최대한 헌신하는 사회'로 설명한다. 그는 보수주의자는 다름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고, 남을 존중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또, 그런 사람을 키워내는 가정과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론대로라면 현대인은 모두 보수주의자다.


돌이켜 보면 아버지와 대화하면서 젊은 혈기에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일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해야 할 일에 집중하라'며 나를 다독이곤 했다. 나는 그 말을 꼭 '세상에 고개를 숙이고 살라'는 소리로 들었다. 듣기 싫었다. 시간이 흘러 아버지가 나를 낳았던 나이가 됐다. 이제 눈이 조금 트인다. 아버지는 인생이 완벽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보수주의자였다. 끝으로 싸이 <아버지> 가사를 덧붙인다. '아버지, 이제야 깨달아요.'


기자의 글쓰기, 박종인 저, 와이즈맵출판
악마도 재미 없으면 안 온다


’두 번 읽고 버려라.‘ 대놓고 자신감이 넘친다. 재수 없는 이성에 끌린다는 심리가 이런 건가. 믿져야 본전이란 각오로 책장을 넘겼다. 처음 책을 읽은 지 벌써 일 년이 지났다. 얼마 전 책장을 정리하다 책과 마주쳤다. 책은 날 보자마자 을러댔다. 두 번 읽으랬더니 고작 한 번 읽고선 날 책장에 처박았느냐면서. 어쩔 수 없다. 다시 읽을 밖에. 그렇게 어색한 재회를 시작했다.


읽는 동안 올라간 입꼬리는 내려올 줄 몰랐다. 작가 필력도 범상치 않지만, 글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보던 글 또 보면 질릴까 싶지만, 글이 볼 때마다 색다르게 재밌다. 울고 웃다 보니 한 시간도 안 돼서 340페이지 책장이 넘어갔다. 신기하게 아쉽진 않다. 마무리는 또다른 시작이라던 글귀대로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순간부터 글감과 의욕이 솟구쳤다.


재밌는 글을 쓰는 방법은 간단하다. 쉽게 쓰고, 구체적으로 쓰면 된다. 그러려면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면 된다. 악마도 재미 없으면 나타나지 않는 법이다. 독자도 마찬가지다. 시간 없다는 현대인이 재미 없는 글에 구태여 시간을 쓸 이유도 없다. 인터넷을 보면 매력은 타고나야 한다며 좌절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결국 나를 포장하는 기술 문제일 뿐이다. 글도 같다. 결국 얼마나 공들였느냐에 달렸다.


아쉽게도 두 번 읽고 버리라는 말은 못 따르겠다. 혹여 버린다면 둘 중 하나다. 너무 많이 읽어서 책을 줄줄 외거나, 글쓰기를 그만두거나. 그래도 계속 달고 살진 않겠다. 사람 따라 글이 다르듯, 나는 나대로 글을 쓰니까. 이따금 길을 잃을 때마다 나침반을 들여다보듯, 간절하면 또 보겠지. 지침서는 원래부터 그만한 거리에 두고 사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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