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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원 Nov 19. 2023

잊으라 일렀지만

일상 13



이른 토요일 아침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이번달부터는 꼭 듣기 시작하기로 나 스스로와 약속한 파이썬 수업을 좀 주워듣고 누군가를 만나기로 한 약속장소에 나가야 했는데, 실은 어느 누구에게도 알릴 수 없는 독특한 만남이었다. 그리고 가는 길의 나는 애달팠고, 애처로웠고, 어쩌면 후련할 기색 하나 없이 목을 내놓을 비장한 낯이었으리라. 


나는 늘 헤어진 사람을 다시 갈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 일갈하는 말버릇이 있었다. 헤어짐과 사랑에 조언이 필요한 사람이 있거든 말의 윤곽이 더 두꺼워졌다. 슬픔을 나눠 옅게 만들고 싶거든 바보 같이 매달리거나 울며 지난 아픔을 토로하지 말고, 손 끝으로 곱게 빗고 마음으로 길게 다듬어 더는 기억이 나지 않을 때까지 쓰다듬으라고 했다. 나는 그런 강압적인 통제 속에 나를 가둬놓지 않으면 자꾸만 아픔을 더듬어서, 흘린 눈물을 마셔 넘기고 다시 눈물을 흘리는 멍청한 짓을 반복하다 마음이 다 녹슬어서. 그러니 그렇게 똑같이 아프지는 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럼에도 내가 헤어진 인연을 다시 보러 간 이유는 그 사람이 내게 지독하게 소중했고, 이십 대의 설익은 감정을 서로 다 안아주지 못할 만큼 서로가 아팠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 길을 나서는 내 토요일을 전해받은 A는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너를 아프게 한 사람이니 그 앞에서 너무 다정해지지는 말자. 마음을 굳게 먹었으면 좋겠어. 하고.


카페에 앉아 기다리는데 내가 아침을 먹지 않았을까 봐 케이크를 주문해 두었고 함께 먹을 커피가 나올 테니 그걸 홀짝이고 있으라는 다정한 메시지가 왔다. 나보다는 건조한 마음으로 온다는 느낌이 들었다. 약속을 잡고서 일주일 내내 주먹으로 애꿎은 책상을 퉁퉁 두드리며 고민한 지난 시간들이 조금 부끄러웠는데, 외려 그런 느낌이 들자 속이 홀가분해졌다. 나는 이미 결심을 하고 왔지만 그는 아닐 거라는, 물증 없는 단정이 어쩐지 길을 터준 것 같았거든.


많은 시간을 보냈어. 2년 만에 얼굴을 마주하는데 꼭 지난주에 한 번 얼굴을 본 사람처럼 이야기가 끊기지 않았다.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일전에 우리의 미숙했던 6년이 어땠는지 토로하기도 했고, 우리는 그랬어, 우리는 아마 서로를 돌아볼 수 없을 만큼 많이 아팠을 거라고, 그렇게 더듬다 보니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스쳐 지나갔다면 서로를 모른 체했을 이 사이가 그 자리에서는 꼭 간절히 보고 싶었던 단짝 친구를 만난 것처럼 포근해져서 쉴 새 없이 입을 달싹였다. 매번 눈을 마주칠 때마다 돌아오는 다정한 웃음이 예전에는 절대로 보지 못했던 웃음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녹슨 마음에 기름칠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움과 미련이 더는 우리 틈새에 머무르지 않게 되더라도 이 정도라면 충분할 것 같다는 생각. 어떻게 지내자고 약속을 한 것도 아니었고, 이 만남의 뒤가 불투명했음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나와 헤어진 뒤에 몸이 많이 아팠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동정심 유발인지 의아했는데, 얘기를 듣고 보니 그런 것도 아니었다. 새벽에 난데없이 내게 전화를 한 게 외로움 때문인지도 궁금했지만 막상 그가 말하는 건 다 그럴법한 이야기들이었다. 새벽 나절 꿈에서 벌떡 깨서 내 전화번호를 눌렀는데 신호가 갔다나. 그는 어렸을 때부터 꿈을 꾸다 벌떡 일어나면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독특한 잠버릇이 있었고, 그 일로 끌어안고 자다 놀라 깬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지라 옅은 헛웃음이 흘렀다. 그가 꾼 꿈이 무엇인지는 듣지 못했지만 어쩌면 나를 기다린 꿈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절대 마음을 꺾거나 다정해지지 않을 거라는 결심을 넘어 다시 만나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한 건 나였다. (A가 들었다면 내 머리를 아주 세게 여러 번 쳤을 것이다.) 참 많은 것이 생략된 것 같지만, 하루를 통째로 보내고 따뜻한 사케 잔을 서로에게 기울여주면서 깊고 깊은 이야기를 나누다 어렵사리 꺼낸 말이었다. 고민하던 일주일 간 나는 많은 시나리오를 적어보았다. 만약 우리가 서로에게 또다시 나쁜 사람이 된다면, 또다시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서로에게 두려운 존재가 된다면. 똑같은 굴레에 더 큰 상처를 받게 된다면. 그래서 더는 서로에게 어떤 미련도 안타까움도 남지 않게 되어서 두 번 다시 서로를 마주하고 싶지 않게 된다면. 그런 마음들을 접어 하나씩 꺼냈다 버리기를 반복했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차갑게 흐르는 바람을 맞으면서, 길가의 수많은 연인들과 그들처럼 한 점이었던 우리를 기억하면서. 


술잔을 기울이다가 씩 웃으며 물어보더라. 정말로 괜찮겠어? 하고. 어떤 특정한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더 예상치 못 한 그 질문을 받자마자 나는 확신이란 것이 들었다. 서른의 나는, 서른둘의 너는, 어쩌면 2년 전의 서로와는 다를지도 모르겠다고. 모난 모서리들이 많은 것에 풍화되어 둥글어지고, 답답한 물살을 어느 정도 참고 기다려줄 느긋함이 생긴 우리는, 어쩌면 서로를 응원하며, 이전의 사랑과는 다른 형태의 사랑을 할지도 모르겠다고.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도 지금의 서로로 충분할지도 모르겠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리고 붙잡았지만 역시 서로가 아니면 모르는 것들이 많아. 누군가의 걱정이나 염려를 무정하게 없는 것으로 치부할 생각은 없지만, 이러나저러나 다른 형태로라도 결국 그 끝이 후회일 거라면 뭐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고 싶었다. 그래서 어제의 대화를 후회하지 않아. 잔뜩 취해 돌아와 침대에 누운 채 전화로 나눈 그 수많은 별무리 같은 이야기들마저도.


그래서 사귀냐고? 그런 건 아니다. 생각해 볼 시간을 달라고 했거든. 보채고 싶지 않아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옛날의 나였다면 토라졌을 일이라고 생각하니 혼자 웃음이 났다. 이제는 기다림이 필요한 시간들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니 그렇게 할게. 


나 스스로에게 늘 잊으라 일렀던 목소리와 얼굴이었다. 모두 잊은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막상 얼굴을 보고 그리웠던 목소리를 들으니 아직 나는 아무것도 잊은 게 없었다는 깨달음과 시간의 무색함이 허를 찬다. 아직도 다정하게 푹 자고 내일 일정을 잘 보내라는 목소리가 기억에 남는다. 그래, 오늘 하루는 정말로 잘 보내야지. (물론 A를 만나러 가지만.) 오늘은 광장시장도 가고, 맛있는 것도 먹고, A와 함께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의 LP를 사러 갈 거다. 이렇게 화창하고 맑은 날이니 좋은 하루가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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