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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원 Mar 18. 2024

세상은 가끔 거꾸로 돌아가기도 해

일상 25, 그리고 그게 순방향이라 불릴 때가 있어



늘 “나의 도시”라 부르는 이 서울에는 나의 공간이라 칭해지는 곳들이 있는데, 대부분은 중구에 있다. 대쵸적으로는 서촌, 북촌, 광화문, 동대문. 가슴이 텁텁하고 건조한 날에는 늘 그 네 군데 중 한 군데를 골라 길을 떠난다. C는 “경복궁은 참 좋은 데에 지어졌어. 터가 좋아.” 하는 내 말버릇을 외워버렸는지, 이제는 내가 우울했다 하면 무조건 내 손을 잡아끌고 그 어드메로 향한다. 아주 조금만 거닐어도 북한산에서 불어오는 조곤한 바람이 땅을 두드리고 내 뺨을 스쳐가는 곳. 요란하고 시끌벅적한 그곳도 사실은 오묘한 고요가 잠들어 있다.


이어폰을 끼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중구의 거리를 나돌다 보면 어디든 발길이 멈추는 곳에 옛 시간이 남아있다. 공연히 마음이 머무르는 곳. 바쁘지 않고, 요란하지 않고, 그때 그 시간이 머문 곳. 허름하고 무너질 것 같은 간판을 보면 저 간판이 막 만들어졌을 때를 무상하게 생각한다. 저 파란색은 원래 어떤 파란색이었을까, 새로 간판을 달아 올리던 사장님은 무슨 마음이었을까… 하고.


아빠가 다니던 YMCA 쪽으로 쭉 걸어가다 보면, 어느새인가 탑골공원까지 와있는데, 그럼 아주 자연스레 발길을 돌려 인사동 골목으로 들어가게 된다. 까치발을 들고 타래과자를 들여다보는 여자아이나 외국에서 온 노신사의 바이올린 소리나 왁자지껄 떠들며 걸어가는 관광객들을 넘어가다 보면 또 어느새 북촌이다. 요새는 창덕궁을 들여다본 적이 없어 벽 너머가 어떨지 궁금해하며 걷는 것이 전부지만, 언젠가는 창덕궁에 다시 들리게 될 것 같아.


태어나길 서울에서 태어나 이리 살며 본 것이 많아도 서울이 내 세상이었던 나에게 중구의 모든 거리가 꿈이다. 요새는 속이 까만 장사치들로 붐벼 여간 별로라는 말이 나오는 광장시장서부터도 그렇다. 다 시간이 지나 녹이 슬어버린 것들이니 어쩔 수 없다 생각하며, 너스레 가득한 걸음으로 바둑 두는 할아버지들 뒤꽁무니를 슬쩍 보는 것이나 낙으로 뒀다.


오늘은 동대문에 다녀왔는데 글쎄, 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동대문 천원시장이 그리 붐비지 않지 뭐야. 우울할 때에는 어디서 난지도 모를 구제 옷들을 노상에 깔아놓고 저 옆집에서 타 온 냉커피 들이마시는 사장님들 얼굴 보는 맛으로 걸었는데. 청계천 책방거리도 요새는 기가 다 죽었다. 세월이 가나보다. 아무도 머무르지 않을 것 같은 끝이 가까워지는 기분이다. 저 사람들이 그곳을 떠나면 그다음엔 뭐가 남을까. 아빠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궁금하다. 어릴 적 살랑살랑 걸어 다니며 좋아하는 여자애 손을 잡고 탑골공원까지 가는 길 내리 보이는 것들이 지금은 변해있을 때. 그때 기억하던 것들이 남아있지 않을 때의 기분 같은 것 말야.


요새는 레트로가 유행이라며? 하고 물으니 C가 웃었다. 누나, 아날로그 좋아하잖아. 지금 그 감성 누리는 게 다 레트로 유행 덕분인 줄 알어. 그렇게 들으니 맞는 말이다. 바이닐을 듣거나, 카세트를 사거나, 오래되고 때 묻은 책을 사거나, 누렇게 닳은 종이의 질감이 기분 좋은 엽서를 사거나… 이상하게 내가 머무르지 않은 시간대의 것들을 참 좋아한다. 그러니 지금 자꾸만 뭍으로 끌어올려지는 옛날들이 너무 좋다. 밟으면 삐걱이는 오래된 판자바닥이나… 바람이 불면 덜그럭 대는 창문도 그래.


오늘은 공책과 연필을 샀다. 일 할 때는 효율이 우선인 내게 삼색펜에 샤프 달린 것만큼 좋은 게 없었는데, 다시 글을 쓰고 연습을 해보려니 연필만큼 좋은 게 없더라고. 옛날 초등학생 때에는 딸깍딸깍 소리가 나는 펜과 샤프가 그렇게 멋있고 좋아서 그것만 썼었는데, 지금은 뭉툭한 흑연이 종이 위를 긁고 지나가는 소리만큼 좋은 게 없다. 요새 공책들은 왜 이렇게 미끄러워? 하고 툴툴거리니 함께 나갔던 E가 특유의 잔잔한 목소리로 대신 답해줬다. 그건 언니가 여태 공책을 안 써서 뭐가 바뀌는지 몰랐던 거야. 종이는 비쌀수록 펜이 잘 먹는 거칠함이 있어. 아, 난 몰랐는데… 그렇게 한참을 종이만 만지다 결국 뻔한 공책을 하나 샀어. 연필로 긁어보는 건 내일 저녁에 할 생각이다.


기분이 좋지 않다가도 좋다가도, 정말 제멋대로인 하루였다. 자유롭고 싶다. (당연히 돈도 계속 벌고 싶고 일도 계속하고 싶다.) 그냥 나에게 여유가 생겼으면 하는 바람. 내일은 중요한 프로젝트의 파이널 오픈일이다. 마지막까지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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