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찐주언니 Jan 24. 2024

저절로 가족중심적으로 살게 되는 캐나다

나가 놀 데가 없어서 오늘도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처음 밴쿠버로 이민 왔을 때가 생각난다. 이제 갓 돌 지난 아이 하나도 버거워 저녁이 되면 바깥에 어디라도 나가서 바람도 쐬고 커피라도 한 잔 하고 싶은데 당시 운전을 못했던 나에겐 어림도 없는 생각이었다. 일단 그 정도 번화가로 나가려면 차를 타고 20분 이상은 나가야 했고, 외출을 할 동안 잠시 아이를 봐줄 누군가의 도움도 필요했다. 그중에 가장 큰 문제는 웬만한 가게들이 저녁 9시면 문을 닫는다는 사실이었다. 9시 이후에 아이와 유모차 끌고 밤마실 나갈 곳은 밤 11시에 문을 닫는 월마트뿐이었다. 술이 고플 땐 근처 편의점이 아닌 리쿼마트에 가야만 살 수 있었고 그마저도 술은 집에 가서 먹지 바깥에서 마시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오죽하면 캐나다에서 술을 마시려면 무조건 지붕 있는 곳에서 마셔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을까. 

답답할 때 갈 곳이라곤 집 앞 놀이터뿐이었고 바람 쐬러 나갈 한강공원 같은 곳은 꿈도 꾸기 어려웠다. 한국에서는 매주 들었던 '불금'이란 단어가 캐나다에선 그저 '내일이면 주말을 맞이하는 하루' 정도에 그치는 듯했고 정말로 주말이 되면 평일엔 9시에 닫던 가게가 저녁 6시면 문을 닫았다.

'아니 다들 주말에 안 놀고 집에만 있는 거야? 이게 말이 돼? 가게들은 돈 벌 생각이 없나? 왜 다들 문을 일찍 닫는 거야? 주말에 장사가 더 잘되어야 하는 거 아니야?'


아이들이 하나 둘 더 생기고 어느 정도 캐나다 문화에 익숙해지는 동안 한국의 정서가 그리웠던 나는 이제야 캐나다 사람이 다 되어가는 것 같다. 답답하지도 않고 지루하지도 않고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캐나다는 원래 그런 나라다. 

그걸 받아들이니 나도 저절로 그렇게 살아지는 것 같다.


주말이면 다들 늦잠을 자는지 도로는 주중보다 한산하다. 위니펙에 몇 군데 없는 쇼핑몰은 주말엔 사람들이 많긴 하지만 그마저도 주말엔 오후 6시면 문을 닫는 탓에 6시 이후엔 차 거리가 더욱 한산해진다. 그리고 그 수많은 차들은 다들 자기 집 앞에 주차되어 있다. 다들 집에 있는 것이다. 주말이나 공휴일엔 친구집이나 다른 가족들 집에 초청받아 가는 것 같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대부분 집에서 시간을 보낸다. 어찌 됐든 캐나다 사람들이 주말과 긴긴 연휴 동안 시간을 보내는 곳은 대부분 '집'이라는 사실이다. 집에선 대부분 무얼 할까.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고, 달달한 간식을 먹으면서 이야기꽃을 피우며 시간을 보낼 것이다. 아이들이 있는 집은 대부분 보드게임을 종류별로 가지고 있는 걸 보면 온 가족이 모여서 보드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같다. 특히나 지금처럼 긴긴 겨울, 바깥은 너무 춥고, 해는 오전 8시 30분에 떠서 오후 5시면 온 세상이 깜깜해지는 이곳에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려면 보드게임만 한 게 없다.




우리도 아이들과 남편과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아이들이 집에 오자마자 배고프다며 오후 4시부터 저녁을 먹는데 그 이른 저녁을 먹으면서도, 저녁을 먹고 간식을 먹으면서도, 아이들이 아빠와 보드게임을 하자고 조르는 순간에도, 아이들이 숙제하고 잠드는 순간까지 우리는 아이들과 이야기하는 시간이 참 많다. 아이들이 잠들고 나면 이젠 남편과 보내는 고요한 시간이다. 육퇴. 남편과 나는 리쿼마트에서 사 온 맥주를 한잔 마시기도 하고, 늦은 밤 커피 한잔을 내려 마시기도 하면서 조용히 소파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오늘 누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어.. 요즘은 일하는 게 어떤 것 같아.. 요즘은 이런 게 힘들고 이런 건 좋고.. 

아이들의 오늘 일과를 다시 한번 리마인드 하기도 하고 육아의 방향을 잡기도 하고 누군가를 함께 흉보기도 하면서 조잘조잘 떠들다 보면 어느덧 12시가 되는 날이 허다하다. 어느 날은 수다에 취해서 운동할 시간을 놓치기도 하고 공부할 타이밍을 놓치기도 한다. 이야기하다가 잘 시간이 되는 것이다.

할 얘기가 너무 많아서 운동을 못해 가끔은 짜증도 나고, 

해야 할 공부가 있는데 잘 시간이라 못한 것도 아쉽지만,

남편과 나눈 이 오밤중 수다시간은 우리 부부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고, 서로를 이해하게 만들어주었다. 

부부간의 대화, 아이들과의 대화시간이 참 많은 캐나다의 삶이 요즘 들어 점점 더 좋다 느껴진다.


가족 간의 대화가 많으니 여러 좋은 점들이 생긴다. 나열하자면,

확실히 삶에 여유가 생긴다.

내가 내 아이들을 잘 안다.

내 남편이 나를 잘 안다.

내가 내 남편을 잘 안다.

우린 서로가 서로를 잘 안다.

이해해 줄 수 있고 언제나 같은 편이 되어줄 수 있는 가족이 있다.

오늘도 애들 자면 남편이랑 맥주나 마시면서 오늘 있었던 사건사고들을 얘기하면서 다 털어버려야지. 


저녁 9시. 아이들이 다 잠자러 들어간 시각. 바깥에 모든 상점들이 문을 닫은 그 시각. 하지만 아직 잘 수 없는 그 시간. 그런데 오늘은 서로 할 이야기가 없는 날엔 같이 소파에 앉아 못다 본 드라마나 영화 한 편을 보기도 한다. 영화 한 편을 다 보고 나면 쉽게 잠들기 아까워 둘이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는 그 시간도 나는 참 소중하다 느낀다. 또 어떤 날은 멍하니 앉아있다가 작은 소재로 시작된 이야기가 끝을 모르고 이어질 때도 있고, 어떤 날엔 기억에서 도저히 지워지지 않는 유년시절의 상처들을 꺼내어 이야기하면서 나 자신을 치유하기도 한다. 어느 날은 남편이 자기가 꿈꾸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우리 가족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우리 아이들이 어떤 아이들로 자라길 바라는지, 지금 우린 어디까지 와있는지 계속해서 되짚어 보기도 한다. 잘한 건 잘했다 다독이고, 서운한 건 서운했다 말하기도 하면서.


바깥으로 나돌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저녁시간은 무조건 가족들과 집에서 보내야 한다. 긴긴 연휴에도 특별히 어디 갈 곳이 없어 무조건 가족들과 집에서 보낸다. 이젠 집에 있어야 시간에 밖으로 나가야 할 일이 생기면 낯선 기분을 느끼는 지경에 이르렀다.


가족이 소중해질 수밖에 없는 캐나다다.

아이들이 어릴 땐 서로 애들을 재우느라, 그리고 애들이 잠들면 온종일 육아에 지쳐 같이 잠들기 일쑤여서 부부가 서로 대화하는 시간을 가지려야 가질 수가 없었는데 이제 아이들이 스스로 자기 시작하니 이 얼마나 행복한지. 아이들이 이 정도 커서야 우리는 이곳에서 살아가는 방식이 얼마나 값진지 알아가기 시작했다. 

함께 나이 들어간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 느끼는 요즘이다. 


캐나다에서는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라고 주말이면 모든 가게가 그리도 일찍 문을 닫나 보다.





 


작가의 이전글 나에게 아무것도 남은 게 없는 하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