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 사는 자상하고 배려 깊은 아빠들
처음 밴쿠버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원룸 아파트를 렌트해서 살았다. 캐나다에 온 지 두 달 후, 아이가 첫 돌을 맞이하고 걸음마를 시작하면서 원룸 아파트에서만 시간을 보내기엔 제한이 많았다. 게다가 그 시기에 남편이 공부를 해야 해서 자리를 비켜줄 겸, 매일매일 아이를 데리고 아파트에서 3분 정도 걸어 나오면 도착하는 놀이터를 매일같이 가곤 했다. 나는 아직도 처음 캐나다 놀이터에 아이를 데려갔던 그날을 잊지 못한다.
우리 아이처럼 작은 아이 두엇이 놀이터에서 놀고 있었는데 다들 엄마는 안 보이고 아빠들이 아이를 돌보고 있는 게 아닌가. 처음엔 '엄마들은 어디 갔지?' 싶었는데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놀이터에 갈 때마다 10에 7은 아빠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터에 나와 놀고 있었다. 한국에서 보통 아빠는 직장에 가 있어 엄마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터를 다니는 모습을 자주 봐왔던 나로서는 익숙하지 않은 광경이었다.
'엄마들은 집에서 쉬나?'
'캐나다는 아빠들이 저렇게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구나.'
한 번은 교회에서 단체로 야외 피크닉을 나간 적이 있다. 우리 모임은 대부분 아기엄마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아이들이 이제 막 걸어 다니거나, 기어 다니거나.. 어찌 됐든 아직 기저귀를 떼지 않은 아이들이 있는 모임이었다. 아기들이 기저귀를 갈아달라고 울기 시작하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아빠들이 먼저 기저귀 챙기고 물티슈 들고 아기를 안고 기저귀 갈러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누구 하나 네가 가라 내가 갈게 하는 일 없이 아빠들이 먼저 아이를 챙기는 모습. 엄마들은 그런 아빠들의 행동이 그저 어제오늘 일이 아닌 듯한 표정으로.. 그런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날씨가 따뜻해지기 시작하면 캐나다에서는 야외 바비큐 파티를 자주 한다. 정해진 시간에 한데 모인 사람들은 각자 차에서 집에서 실어온 물건과 음식들을 꺼내고 각 가정의 사람 수만큼 캠핑의자를 꺼내온다. 테이블과 캠핑의자까지 세팅이 끝나면 아이들은 이미 파크 여기저기 흩어져 놀기 시작하고 엄마들은 일단 자리에 앉아 수대 삼매경에 빠진다. 아빠들은 어느 누구 하나 자리에 앉는 사람 없이 고기불판을 세팅하고 고기를 굽기 시작한다. 한 번은 한국에서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은 한 남편분과 함께한 적이 있었는데 그분은 의자 세팅이 끝나자마자 모든 여성분들과 함께 자리에 앉으셨다. 하지만 그분을 제외한 모든 남자분들이 고기를 굽는 모습을 보더니 머쓱해져서 슬금슬금 일어나 고기 굽는 남자분들 옆에 서 멀뚱멀뚱 계시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면서
"여기는 고기를 아빠들이 구워요?"
"네. 여기 캐나다에서는 그렇게 남자분들이 앉아계시면 안 됩니다. 고기는 아빠들이 굽는다, 그리고 아이들부터 먹인다, 우리는 제일 마지막에 먹는다. 이게 룰이거든요."하시는 어떤 분.
얼마 전 2월 14일이 캐나다 밸런타인데이였다. 한국에서는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초콜릿을 선물해 주는 날이지만 캐나다에서는 남녀 할 것 없이 사랑을 고백하는 날이다. 밸런타인 며칠 전부터 마트에서는 선물용 꽃다발과 작은 화분들을 팔기 시작하는데 밸런타인 당일이 되면 마트에 장을 보러 갈 때마다 꽃을 고르기 위해 모여있는 아저씨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매년 밸런타인데이 당일에 장을 보러 마트에 갈 때마다 그 모습을 보게 되는데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된다. 젊은 아저씨부터 나이 많은 할아버지까지. 집에 있는 아내에게 줄 꽃다발을 고르기 위해 옹기종이 모여있는 남자들의 모습이란.. 꽃을 선물 받는 순간보다 그 꽃을 고르기 위해 고민했을 그 마음이 너무 예쁘고 스위트해 보인다.
몇 가정이 모여 식당을 가도, 어느 가정에 초대를 받아 놀러 가도, 피크닉을 나가도 엄마들은 앉아있고 아빠들이 벌떡벌떡 일어나 필요한 것들을 갖다 준다. 음식 세팅도 하고 뒷정리 후엔 커피도 내려주고 다과도 챙겨준다. 놀이공원을 가면 엄마들은 적당히 걷다가 그늘진 곳에 앉아 쉬고 있고 아빠는 아이들과 놀이기구 타고, 아이들 화장실 데리고 다니고, 수영장을 가면 엄마들은 적당히 아이들과 놀아주다가 일찍이 그늘막 텐트를 치고 앉아 눈으로 아이들을 감시하고 아빠는 아이들과 놀아주고. 그게 언제나 당연한 것처럼.
캐나다에서 가족, 친지 누구의 도움 없이 세 아이들을 키우면서 남편과 나는 사랑과 전우애, 찐 우정을 아우르는 사이가 되었다. 내가 힘이 들 때 기댈 수 없는 사람은 오로지 남편밖에 없었고, 내가 내쉬는 한숨 한 번에 남편은 그 한숨이 어떤 의미인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육아에 지치고 내 삶에 지쳐 매일매일을 울었을 때도 남편은 나에게 내가 지금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지 매번 말해줬고 틈틈이 혼자만의 시간을 허락해 주었다.
"엄마 좀 쉬게 아빠랑 놀이터 가자."
"엄마도 혼자있을 시간이 필요해. 오늘은 아빠랑 수영장 갔다오자."
"여보는 드라마 보면서 좀 쉬어. 내가 애들 데리고 스케이트 타러 갔다 올게. 썰매 타러 갔다 올게. 자전거 타고 올게. 산책 갔다 올게..."
"고생했어. 좀 쉬고 있어. 애들 데리고 나갔다 올게. 낮잠 좀 자. 조용히 공부하려면 하고."
"애들은 나가면 엄마 찾지 않아. 내가 세명 다 데리고 갈 수 있어. 쉬어, 쉬어, 쉬고 있어..."
늘 나에게 숨 쉴 구멍을 주는 남편이었다. 그리고 주변에 많은 아내들이 나와 같은 배려를 받으며 살아간다.
캐나다에 사는 아빠들은 참 다정다감하다. 아내에게 그렇고, 아이들에게도 그렇다. 한국처럼 근무강도가 세지 않고 오버타임이 없는 환경이라 그런가 하는 생각도 든다. 캐나다에 사는 아빠들 중에 '나의 직장 일이 끝났으니 집에서 쉬어야지'하는 마인드를 가진 분들은 아직까지 만나보진 못했다. 혹시라도 그런 분이 있다면 주변 아빠들을 보면서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시게 되지 않을까. 캐나다에 사는 아빠들은 가정에 충실한 것을 무조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너의 일과 나의 일이 있을 수 없고, 너의 일을 돕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을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역시 '배려'이다.
나는 이런 모든 남편들의 배려 뒤엔 자신이 직장에서 일을 하는 동안 아내는 집에서 아이들과 하루종일 얼마나 바빴고 힘들었고 지쳤을지를 알고 충분히 이해하는 그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오죽하면 직장에 나가서 일하는 시간이 자유시간이라고 말할까. 아이들과 하루종일 집에서 지지고 볶아본 아빠들이라면 그 말에 본인들이 수긍하기도 한다. "맞아.. 이렇게 애들하고 집에서 종일 이러고 있느니 차라리 직장에 나가있는 게 쉬는 거야. 직장 가면 런치타임도 있고 동료들이랑 수다도 떨 수 있고, 퇴근하면 일은 끝나거든."
너와 나의 일을 따지지 않는 마음.
집안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알아주는 마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내가 하겠다는 마음.
엄마가 행복해야 가정이 행복하다는 것을 아는 마음.
자기 일을 포기하면서 가정주부가 된 아내에게 사랑한다, 고맙다 표현하는 마음.
이런 모든 마음들이 캐나다 아빠들에게 가득하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집안 일과 온갖 육아와 라이드에 지친 엄마들에게 남편이 주는 이런 배려가 당연한 것은 아니다. 남편의 배려를 당연하게 받지 않고 그 마음을 고맙게 받으면서 주어진 시간 쉼을 통해 엄마가 조금이라도 회복되고, 엄마가 행복해지니 그 마음이 다시 똑같은 일상을 살아야 하는 일에 힘을 내게 되고, 그래서 가정이 계속 화목하게 굴러간다. 결국 이 배려는 남편들의 지혜이고, 이것이 소중한 가정을 평화롭게 지키게 되는 밑거름이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