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단절 10년. 캐나다에서 간호사 되기 준비
일주일 전. 기말고사 4일 전. 공부 시작한 지 3달. 내가 적어놓은 노트장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이게 정말 뭐 하는 짓인가 싶다...'
드디어 길고도 길었던 가을텀이 끝이 났다.
'70점 그까짓 거 넘고 말지' 했던 순간이 '대체 어떻게 70점이나 받아야 한단 말인가'로 변한 순간이 하루이틀이 아니었다. 캐나다 답게, 융통성이라곤 없이, 느닷없이 걸려왔던 그날의 전화처럼, 휴가에서 돌아오고 있는 중에 '내일 개학'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시작된 개학이었다. 10년을 주부로 살던 내가 하루아침에 학생이 되었고, 마음의 준비도 없이, 이 과정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이 모든 것이 휘몰아쳤다.
당장 필요한 교과서는 어디서 사야 하는지도 몰랐다. 온라인 수업을 해준다는 건지, 혼자 공부를 하라는 건지 조차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개강은 했다는데 매일같이 정부와 학교에서 날아오는 메일을 읽고 그들이 필요하다는 서식지를 작성하고 보내는 일도 벅찼다. 개강은 했다는데 내가 제출해야 하는 자료들은 많이 남아있는 듯했다.
'아..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
영어도 모르겠고, 교과서도 모르겠고, 이미 어떤 과목은 오리엔테이션까지 진행을 한 것 같은데 난 오늘 들어왔으니 오티는 뭐 이미 물 건너갔고..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어서..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학교를 다닐 조건이 된다기에 오케이를 했는데 그 이후로 나에게 주어진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바다 한가운데 뗏목 하나 던져주고 '살 수 있을 테면 살아서 돌아와 봐' 하는 것 같았다.
근무 중인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바닥에 앉아 징징대는 4살 아이처럼 울어댔다.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고. 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공부를 뭐. 어떻게 하라는 거냐고. 어쩌면 이렇게 다들 무책임하고 이럴 수가 있느냐고.'
말 그대로 패닉이었다.
내가 원하지 않은 상황이었고 내가 다룰 수 없는 상태였다.
영어라도 잘해야 그 많은 글들을 꼼꼼히 읽고 대처를 할 텐데, 너무 많은 영어가 쏟아지는 순간 안 그래도 영어 공포증이 있는 있는 나는 발만 동동 구르고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공부였다.
모든 것이 스트레스였다.
그동안 가정주부로서 집안을 나름 잘 운영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당장 애들 먹을 것부터 내일 도시락, 앞으로의 도시락, 앞으로의 밥, 앞으로 장 보는 것, 앞으로 집안일, 애들 라이드.. 모든 것이 토할 듯이 나에겐 장애물들일뿐이었다. 공부하느라 (어느 날은 하루에 12시간 넘게 책상 앞에 앉아 코 박고 있느라) 방문 밖에서 아이들이 뭘 먹고 어떻게 집에서 지내는지 도통 물어볼 겨를도 없었다. 오늘 당장 이 과목의 공부를 마치지 못하면 모든 일정이 딜레이 될 테고 나의 작은 숨통이었던 주말마저 반납해야 할 상황이었다.
아침 7시에 일어나 아이들 학교 데려다주고 집에 돌아오면 8시 반. 대충 커피 한잔 들고 책상에 앉아 공부하다가 정신 차리면 3시. 아이들 데리러 갈 시간이었고, 집에 오자마자 냉장고를 털어 할 수 있는 아무 음식이나 해서 먹이고 뒷정리하고 6시부터 또다시 책상 앞에 들어앉아 공부. 시계는 어느덧 밤 12시. 내일을 위해 1시에는 무조건 자야 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열심히 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영어를 해석하는 건지, 공부를 하고는 있는 건지도 몰랐다. 매일같이 꿈을 꾸는데 꿈속에서도 나는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끔찍했다.
9월만 버티자고 생각했다. 목표를 너무 크게 잡지 말고 일주일씩 끊어서 딱 4주만 버텨보자.
딱 한 달만..
일단 한 달을 버티고, 그다음엔 10월을 버텨보자. 언젠간 12월이 오겠지.
가을텀 기말고사를 마치고 나니 12월 5일이다.
내 생일은 이미 하루 전날 어찌어찌 지나갔다.
생일도 미뤄두고 장장 15주를 미친년처럼 내달렸다.
'책상에 코 박고 공부만 했다'는 말이 딱 맞았다.
그동안 몇 가지 과제도 제출하고, 매주 과목별로 퀴즈도 보고, 중간고사도 보고, 기말고사까지 끝났다. 남들은 한걸음에 내달릴동안 나는 겨우겨우 온몸으로 바득바득 기어서 여기까지 왔다. 공부하다 느닷없이 울기도 많이 울었다. 포기하고 싶었던 날도 많았다. 매주 공부해야 할 방대한 양을 감당할 능력이 나에겐 없었다.
다행히 패스는 한 것 같다.
겨울텀은 1월 6일부터 시작한다니 나에게 딱 한 달의 여유가 생겼다.
지금은 내가 너무도 바라고 바랐던 겨울방학, 연말이다.
이렇게 겨울텀을 마치고, 봄텀에 병원 실습까지 마치고 나면 내가 정말 간호사로 일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평생을 영어에 발목 잡혀 가정주부로 살다 죽을 줄만 알았는데. 평생을 남편이 벌어오는 한 푼 한 푼에 의지해 살아가야 하나.. 마음이 슬펐는데.. 그랬던 내가 정말로 일을 할 수 있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어떻게든 버텨!'
사람들이 나를 응원하며 가장 많이 해준 말이다.
영어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특히 간호 공부를 영어로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울지 상상도 안된다며.. 그럼에도 무조건 버티라고. 버티면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다고.
그렇겠지.
안 되는 영어도 버티고 버티다 보면 내 실력이 항상 그 같은 자리에 있지만은 않겠지. 하나씩 하나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겠지. 한 단어 한 단어 사전 찾고 번역기 돌리느라 한 문장 읽기도 힘들었던 내가 이제 어느 정도는 눈으로 쓱 훑어볼 수 있을 정도가 된 것만 봐도 3개월의 시간이 허투루 지나간 것 같진 않으니 말이다.
앞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요즘이다.
캐나다에 와서 나 혼자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커가는데 엄마인 나는 그냥 늙어만 가고 있었다.
이 아이들이 다 크고 나면 난 어쩌지 싶어 넷째를 가지는 것이 최선인가도 싶었다.
오래 살진 않았지만 지금까지의 삶을 뒤돌아보면 언제나 '타이밍'이라는 녀석이 나의 삶을 뒤바꿔놓는 경험을 한다. 내 의지가 아닌, 내 계획이 아닌 그저 '타이밍'이 한 일이다.
느닷없이 나타나는 타이밍에 잘 업혀 타기만 하면 어떤 때는 내 계획에 전혀 있지도 않았던 어느 새로운 곳에 내가 놓이곤 한다. 새롭고 낯선데 싫지만은 않다. 적응하고 싶어지고 잘 견뎌내고 싶어지는 때가 있다.
운이라고도 하고 기회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민생활 10년 동안 가장 큰 기회를 만났다면 나에겐 사실 지금이다.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채 맞이하게 된 이 타이밍 앞에,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최선을 다해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알고 싶다.
'내가 해내는 일이라면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해낼 수 있는 일이야'
내가 남편에게 자주 하는 말이다. 이런 말을 하는 동안엔 난 참 자존감이 낮은 사람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해낼 수 있는 일이 어디까지인지 알고 싶다.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도 알고 싶다.
이제 겨우 아직 마흔도 되지 않았다.
앞날이 창창한 20대보다, 아이를 다 키운 지금 나의 앞날이 더 창창하다고 자부한다.
나의 앞날을 응원해 주는 내 편이 엄마아빠 두 사람에서 남편과 나의 아이들 셋으로 늘어났다.
공부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매일같이 공부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날이 많다. '엄마 공부 그만하고 와서 좀 쉬어.' '엄마 공부하느라 많이 힘들죠.' 늘 아이들이 나를 위로해 준다.
'엄마도 이만큼 했어. 너희는 더 잘할 거야. 엄마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너희들한테 보여줄게. 엄마가 해낸 일이라면 너희들은 이 세상에 못 해낼 일이 없어'
3학기 중에 이제 겨우 한 학기가 끝났다.
3분의 1이 끝났다.
3분의 2가 남았다.
나는 여전히 부족하고 어렵고 두렵고 온몸이 바들바들 떨린다.
영어 공포증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그런데 어쩌겠나. 영어를 쓰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곳에 살고 있는데.
맞짱도 자꾸 뜨다 보면 낯선 친밀감 같은 그런 거라도 들지 않겠나 싶다.
내가 캐나다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적응해서 직장 가는 게 두려워지지 않는 그날에 누구에게든 말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저도 했어요. 이런 제가 했으면 이 세상에 그 누구도 할 수 있어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