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상예찬 May 11. 2024

생초보 아저씨의 미술관 도전기-73

酒神 바쿠스.

<The Adolescent Bacchus, 1597-1598>

- Caravaggio


애주가는 아니지만 가끔 와인을 한 잔 마신다. 네덜란드엔 저렴한 와인이 많은데다 다행히 입맛도 싸구려라 마시는 데 별 부담은 없다. 어제 저녁 와인 한 잔 옆에 놓고 전에 미술관에서 찍은 사진 파일을 들추던 중, 요상한 표정을 한 어떤 청년이 떠올랐다. 바로 카라바조의 <청년 바쿠스>다. 참고로 그리스 신화의 술의 신 디오니소스를 로마 신화에선 바쿠스라고 한다. 


먼저 바쿠스의 출생과 포도(주)와의 연관성을 간단히 적어 본다. 바쿠스는 제우스와 테베의 공주 세멜레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멜레가 제우스의 부인 헤라의 함정에 빠져 죽을 때 제우스는 뱃 속의 아이(바쿠스)를 몰래 자신의 허벅지에 넣어 빼돌리고 나중에 요정들에게 시켜 아이를 키우도록 했다. 이 때 그가 살던 굴 앞에 포도나무를 심어 헤라의 눈을 피하게 했다. 바쿠스는 이 포도를 먹고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포도주 만드는 법을 알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술의 신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Caravaggio <The Adolescent Bacchus>. 우피치 미술관.

한 청년이 와인이 가득 든 잔을 관람자에게 내밀고 있다. 명암법의 대가 카라바조 작품답게 어두운 배경을 뒤로 하고 빛이 인물과 테이블에 강하게 비치고 있다. 상당한 팔 근육, 포동포동한 볼살, 풍성한 머리숱이 눈에 띈다. 잘 먹고 자란 건강한 청년의 모습이다. 


특이한 점이 있다. 눈빛이 매우 몽환적이다. 술에 취해 눈빛이 게슴츠레해진 건지 모르겠으나 동성애자 느낌도 난다. 어떤 자료에선 이 작품의 모델이 카라바조의 친구라고 한다. 모델 살 돈이 없어서 친구를 한 번 불렀나 보다. 친구가 정통 이탈리안이 아닌지 얼굴이나 머리색이 동양적인 느낌도 좀 있다. 설명을 보면 테이블에 있는 과일이 상해 있는 것이 성적 쾌락에 대한 경고나 청춘의 유한성을 상징한다고 한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와인과 포도가 등장하긴 하지만 酒神이라고 하기엔 포스가 약하다.


Caravaggio <The Sick Bacchus, 또는 Self-Portrait in the Guise of Bacchus>. 보르게세 미술관.

카라바조가 그린 또 다른 바쿠스도 생각났다. 보르게세 미술관에 있는 <병든 바쿠스>다. 주세페 체사리(Giuseppe Cesari) 공방에서 꽃과 과일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정물화가로 활동할 당시 그린 그림이라 한다. 정물화 전문답게 포도를 정성스레 그리기는 했다. 


인물의 얼굴과 입술이 창백하다. 바쿠스라는 제목이 없었다면 그냥 정신이 좀 오락가락하는 사람이 머리에 화환 두르고 포도들고 장난치는 느낌이기도 하다. 오른쪽 상반신을 드러내고 하체도 상당히 벗은 채로 포도를 만지작거리며 관람자를 유혹하는 것 같다. 아쉽지만 누군가를 유혹하기엔 외모가 심히 부족해 보인다. 이 작품에 <Self-Portrait in the Guise of Bacchus>라는 또 다른 제목이 있는 걸 보면 아마 카라바조 자화상인가 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제목만 바쿠스이지 酒神 느낌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어보인다.


(좌) Guido Reni <Drinking Bacchus>, (우) Rubens <Bacchus>. 미술관 다운로드.

미술관에서 직접 본 건 아니지만 진정한 바쿠스가 뭔지를 보여주는 두 작품이 있다. 바로 귀도 레니의 <Drinking Bacchus>과 루벤스의 <Bacchus>이다. 


귀도 레니 작품에선 바쿠스가 통통한 어린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머리엔 포도넝쿨을 뒤집어 쓰고 한손으로 머리통만한 와인병을 병나발 불고 있다. 앗! 동시에 오줌도 싸고 있다. 젊은 시절 주변에서 이런 사람 한 두명 본 거 같다. 주변인 신경 안쓰고 술을 계속 원샷하고 아무데나 오줌누는 진상 끝판왕. 아이 모습이니까 약간 귀여운 걸로 커버치고 넘어간다 


루벤스가 그린 바쿠스는 귀도레니의 꼬마가 어른이 된 버전 같다. '부어라 마셔라'가 뭔지 제대로 보여준다. 가운데 앉은 바쿠스는 체격도 육중하다. 술 잘 드실 거 같다. 여인이 따라주는 와인을 받고 있는데 잔도 보통 큰 게 아니다. 750ml 짜리 한 병 다 들어가겠다. 여인 옆에선 Satyr가 와인 한 통을 원샷하고 있다. 바쿠스 오른쪽 아래에선 한 아이가 떨어지는 와인을 받아 마시고 있고, 왼쪽 아이는 시원하게 오줌을 갈기고 있다. 酒神이 마시는 자리는 이 정도는 해줘야지! 이태백의 시 '장진주(將進酒)'에 나오는 구절 '마땅히 한번 술을 마시면 삼백잔은 마셔야지'와 딱 어울리는 바쿠스라 할 수 있다. 화풍이 누가 봐도 루벤스(또는 루벤스 공방) 그림 같다. 인물들이 대부분 포동포동하고 붓질이 살아서 춤추는 것 같다.


바쿠스 하면 크레타의 공주 아드리아네를 아내로 삼은 스토리, 뭐든 만지는 족족 금으로 바꾼다는 미다스왕(Midas)와 관계된 이야기 등도 있지만, 와인과는 크게 관계없으니 패스한다.


와인 한 잔 마시다가 난데없이 그리스/로마 신화까지 다시 들췄다. 

작가의 이전글 생초보 아저씨의 미술관 도전기-7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