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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논 Jun 03. 2024

C ~시작된 얀데레 지옥~

나를 잊은, 그리고 잊을 사람들 #7. 불안형 인간이 숨기고 있는 진심

(C의 이야기는 전전편에서부터 이어집니다)


내가 관계에 있어 불안감을 갖고, 집착하는 배경에는 내 '안전한 사랑'을 찾고자 하는 바람 때문이다. '안정적인'이 아니라 '안전한'이라는 시점에서 이미 내 애정 형성 과정은 상당히 뒤틀려 있단 뜻이기도 하다.


안전한 사랑이란 무엇인가. 답을 뾰족하게 내리기 어렵지만 적어도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내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 따듯한 관계여야 한다는 것. 그런 점에서 C와의 관계는 딱히 안정적이지도, 그렇다고 안전하지도 않았다. C는 언제든 내게서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내 입장에선 칼자루를 들고 있는 위험한 인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를 안전치 못한 사람이라고 여긴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가 자신의 마음이 변해가고 있다는 걸 숨길 생각이 일절 없었던 부분도 개중 하나였다. 자신의 '질린다'는 감정을 무방비한 상태에서 받아들이고 상처받아야 할 상대방까진 고려하지 않는 사람이란 뜻이고, 그것은 곧 그 마음이 완전이 연소했을 때 얼마든지 내게 재를 뿌릴 수 있는 사람이란 의미기에. 결국 나도 그가 언젠간 던질 잿더미를 대비하기 위해 억지로 방진대책을 세워야만 했으니까.


C는 점점 바쁜 날이 늘었다. 페이스북에 '오늘 운동 완료' 같은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 정보는 때려 박으면서, 답장이 오는 빈도는 점점 뜸해졌다. 당시엔 내가 C보다 운동을 더 열심히 할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운동 핑계로 연락을 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세트와 세트 사이 기구에 앉아 핸드폰만 5분 이상 보는 몸이란 거 누구보다 잘 아는데 무슨 헛소리야.


결국 C는 내게 공격을 시작했다. 그는 공격할 의도가 없었지만, 내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는 그것을 공격이라 이해하고 반격을 시작했다. '선빵'은 이거였다. 그가 6시간 넘도록 답장이 없던 날. 그의 페이스북에 초록색 활성화 버튼이 떴던 것. 이런 알기 쉬운 트랩에 걸리는 뻔한 사람이 나였다.


"그런 거 하나하나가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거라니까"


내 반격은 결국 반사 카운터를 맞고 내 HP를 깎는 결과를 초래했다. 왜 연락은 안 하면서 SNS는 접속 중이냐는 말은 사실 '나는 너를 감시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뜻이고, 이것은 곧 집착이나 스토킹이라 해석시킬 수 있는 양날의 검이기에 처음부터 리스크가 큰 반격이긴 했다. 그래도 그 공격을 잘 견뎌내고 이번 라운드를 마무리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튕겨냈다.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C의 마음은 이제 나를 고려할 이유가 일절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멍청한 사람이 아니기에, 연락을 6시간 동안 하지 않는다는 것이 대한민국 땅의 연인사이에 어떤 뜻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SNS에 중독되어 있는 나를 생각했다면, 그 시간 사이에 내가 SNS에 접속할 거란 것도 뻔한 일. 그 결과 자신이 '의도적으로' 연락을 피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날 것임은 나에 대해 조금만 생각해보면 너무나 쉽게 도출할 수 있는 결과였다. 당시 나는 이런 복잡하지도 않은 생각의 연결을 놓아버린 C가, 어찌보면 은연중에 선전포고를 날린 거라고 해석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때도 C는 분명 집착과 자존감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그의 해석에 의하면 나는 자존감이 낮아 집착을 하게 된 케이스라고 한다. 그와 조용한 곳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나눴던 이야기였는데, 어린 내게 꽤 큰 영향을 준 내용이라, 당시의 젖어있던 분위기가 시간이 흐른 지금도 가슴 속에 선명하다.


"너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 상대방이 너를 사랑하는 걸 그대로 믿지 못하는 거야."

"난 오히려 나를 너무 사랑해서 문제인데,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왜 너를 사랑한다고 생각해?"

"난 예쁘잖아. 주변 사람들도 다 나 더러 예쁘다고 말해. 학원에서도 가능성 있는 학생 취급을 받아서 다양한 제의도 들어오고, 스터디에서도 다들 그래. 내가 학벌만 좋았으면 진작에 붙었을 애라고."

"그러니까. 그게 전부잖아."


C의 말에 의하면 내 자존감은 오로지 다른 사람에 의해 형성된 거라고 한다. 정말로 나 스스로를 예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주변에서 그런 말을 해주고 띄워주니 그걸 믿고 알게 된 거짓 자존감이라고. C는 나를 만나면서 내가 그렇게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라고 느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어쩌면 너무나 과도한 경쟁 속에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게 일상이 되어 그런 게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해본 적 있단다.


그의 의견에 따르면 그랬다. 나는 바깥에서 거울을 보는 것을 싫어했다. 실제로 지금도 그렇다. 나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거울에 비춰지는 내 모습을 지금도, 그때도, 보기 싫어했다. 집 화장실과 화장대, 자주 다니는 곳에서 준비하고 예쁜 척 바라보는 내 모습. 그게 아닌 자연스럽게 비춰지는 모든 것들로부터 외면했다. 스크린도어, 카페 벽면에 붙은 거울, 흐트러진 채 볼 수 밖에 없는 술집 화장실 거울 등. 당시의 나도 스스로 인식하고 있을 정도였다. 오히려 그것을 C가 알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였다. 매번 '예쁜 나'를 자처하며 당당한 척 굴었던 나였고, 어설프게 아는 지인들은 아무도 몰랐던 부분인데.


거울을 보기 싫어했던 이유는 딱 하나다.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 마음에 드는 외모가 아니라서가 전부다. 사실 객관적으로 따졌을 때, 애초에 방송 일을 준비한다는 시점에서 내 외모가 절대적으로 떨어지는 편이 아니라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지금까지 외모로 불이익을 본 적도 없었고, 오히려 유치원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소외라는 걸 모르고 살았던 삶이다. 그럼에도 스스로의 외모를 싫어했던 것은 딱 하나다. 결국 나는 '남들보다 예쁜 사람이어야' 했으니까.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또 비교해서, 스스로를 깎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객관적으로 괜찮은 사람이지만, 주관적으로도 괜찮은 사람일까, 하면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예쁘다고 들은 횟수 이상으로, 나보다 더 예쁜 사람들이 존재하는 상황이 더 많았다. 어느 모임을 가도 결국 예쁜 것만이 장점이었던 나보다 더 예쁜 사람은 존재했고, 그런 나보다 못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각각이 가진 매력으로 나보다 더 많은 인기를 누리는 경우는 늘 존재했다. 분했다. 나는 10000:1의 경쟁률을 오로지 카메라테스트와 프로필 사진으로 뚫어야 하는 사람인데. 저딴 짜바리 하나도 매력으로 이기지 못한다니, 그럼 내 꿈은 더 이상 승산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더욱 집착했다. 운동에, 다이어트에, 피부과에, 시술에, 셀카 보정까지. 예쁘지 않은 나를 보는 것은 곧 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극도로 싫었다. 당연히 나보다 예쁘다는 취급을 받는 모든 존재들도 함께. 


그래서 은연 중에 생각하고 있었다. C같은 객관적으로 매력적이지 않은 외모를 가진 사람이 나를 좋아해주면 차라리 마음이 갔다. 그것을 가슴 한 켠 어딘가에서 '안전성'으로 인지하는 장치 역할을 했던 모양이다. 그것을 나의 우성이 아닌, 상대의 열성으로 채우고자 했던 시점에서 애초에 어린 나는 건전한 사람이 아니었다. 


반면,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은 싫었다. 우선 이만큼 예쁜 내가 우성으로 인지하는 사람이니, 얼마나 출중한 사람이겠어. 그런 인물이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을 보게 되면 그를 좋아하게 될 테니까. 그런 괜찮은 사람과 사귀게 된다 한들 나보다 화려한 공작새가 나타나는 순간 우리 관계는 반드시 깨질 걸로 생각했다. 그 생각이 상대방의 진심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그 사람들이 나를 좋아할 리 없다는 불건전한 생각. 어쩌면 C의 말대로 내 자존감이 너무나 낮아 그들의 하얀 마음을 새카맣게 받아들이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내가 모든 마음을 전부 곡해해서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의 감정에 예민했는데, 지금껏 살며 겪어 온 데이터베이스가 결국 "나보다 괜찮은 사람은, 결국 나보다 나은 사람을 향해 가게 되어있다"는 가치관을 확고히 다지게끔 만들었다. 그래서 오히려 C 같은 사람들이 내게 열렬히 구애할 때, 나는 그들을 보고 새로운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내가 그를 등지지만 않는다면, 우리의 관계는 분명 오래 지속될 거야. 내가 노력만 한다면 그 사람들을 언젠간 좋아할 수 있어.' 같은. 즉 지금까지 경험이 통계내린 '언젠가 버림받을 위험'보다 '내가 노력하면 지속되는 관계'를 선택한 것이다. 결국 대전제는 '나는 언젠가 반드시 버려지는 매력적이지 못한 사람'이었단 뜻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C가 말했던 말이 맞다. 자존감이 무척 낮기에 관계에 있어서도 그나마 덜 아플 시련을 선택하는 것이 디폴트가 된 불건전한 사람. 타인에게 사랑받음으로써 내 자존감도 충전할 수 있다고 믿는, 그런 불안정성과 늘 싸우는 존재. 


그러나 C도 그랬고, 다른 못생긴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상대방이 반드시 지쳐서 떠나는 엔딩. 잘난 사람과 만날 땐 그 사람의 마음이 다른 곳으로 향할까 불안해 그를 옭아 맸다면, 못난 사람들과 만날 땐 내가 희생한 안전성이 행여나 깨질까 집착했다. 그들은 언제나 내게 처음과 똑같은 무한한 애정을 보내야만 했고, 그것이 내 자존감 충전기 역할을 톡톡히 해내야만 했다. 그것이 조금이라도 성능을 줄이는 순간, 그것은 나를 향한 공격이었고, 이만큼 노력해 준 내 노고를 무시하는 행위로 인식했다. 차라리 사지를 다 뜯어서라도 평생 내 곁에 둔다면 그럼 내가 힘든 일은 사라질텐데. 그런 위험한 생각마저 진심으로 하게 될 만큼, 타인과의 관계는 만나면 만날 수록 내 정신을 피폐하고 힘들게 만들었다. 스스로 가슴팍을 메스로 난도질하면서.


우리같은 불안형 애착 유형을 가진 사람들은 늘 그렇다. 학계에서는 어릴 때 받지 못한 정서적 불안, 또는 가정환경 때문에 안정형 애착 유형 형성에 실패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말한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상했다. 내가 관계에 있어 불안함을 느끼는 이유는, 장담컨데 유년시절과 가정환경에는 없다. 분명 학계에서도 말하지 않는 후천적 이유가 강하게 작용할 거라고 생각했다.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각각의 이유를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내 경우는 C가 말한 것처럼 무한 경쟁에 시달리며 극도록 낮아진 자존감도 큰 작용을 했다. 분명 다른 사람들도, 내면에 숨겨둔, 타인의 마음을 곧이 곧대로 인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스위치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하나가 아닌 사람도 있다. 적어도 나는 그 스위치가 여러 개라 매일 지뢰밭을 걷는 '정신이 좀 아픈 사람'이다. 하지만 그것이 몇개라 한들, 적어도 하나의 스위치 정도는 파악하고 있는 것이 분명히 도움은 된다.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이. 과한 집착과 온전한 사랑의 형태에 얽매이고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문제임을 인지한다면. 무작정 "아 앞으로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의 스위치와 마주할 수 있는 계기를 먼저 찾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C처럼 누군가의 말이어도 괜찮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아주 가끔, 타인의 말에 휘둘릴 필요도 있다. 그 스위치가 무엇인지 명료하게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우리 불안형이자 파괴형 애착유형을 가진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fin.


[나를 잊은, 그리고 나를 잊을 사람들 시리즈]

만남, 사랑, 질투, 욕정... 어떤 관계든 반드시 근간이 되는 감정은 존재합니다. 이를 잘 들여다볼 줄 안다면, 인간관계는 그 어떤 책 보다 좋은 성장촉진제가 됩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겪은, 내가 떠나보낸 가족, 친구, 동창, 연인들을 추억하며. 그들이 내 인생에 있어 어떤 자양분이 되었는지 정리하는 에세이 시리즈입니다. 제 경험을 통해 독자 여러분도 다양한 인생을 경험해 본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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