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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린 Nov 19. 2018

우리가 그토록 '인싸'가 되고싶어하는 이유

소설 <편의점 인간>을 읽고

@Osaka, Japan
그때 나는 비로소 세계의 부품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지금 내가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세계의 정상적인 부품으로서의 내가 바로 이날 확실히 탄생한 것이다.


어쩌면 내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지 힘든 현실속에서 ‘나’의 가치를 확인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리는 소설 <편의점 인간>. 처음엔 뭐 저런 ‘비정상’적인 사람이 다 있나 하며 봤는데, 그건 정상적인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했던 내 얘기였고 우리 얘기였다.

세상에서 가장 가치가 없는 것 같은 내가, 어디선가 ‘쓰임’받고 ‘필요’로 하는 존재라면, 그걸 확인 받는 게 삶의 이유 아닐까. 어쩌면 이 지루하고도 고된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는 이유는, 이 넓은 세상에서 작은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계속해서 확인받고 증명하기 위한 것임이 아닐런지.

다른 사람한테 해를 끼치지 않더라도 그저 혼자만을 위해 산다면, 그것으로도 삶이라 부를 수 있지만, 사람들은 그런 삶을 살때마다 자신이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그래서 내가 계속해서 무언가를 하고 나아가고 싶은 이유가 바로 세상에 내 가치를 증명하고싶어서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왜 편의점이 아니면 안되는지, 평범한 직장에 취직하면 왜 안되는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완벽한 매뉴얼이 있어서 ‘점원’이 될수는 있어도, 매뉴얼 밖에서는 어떻게 하면 보통 인간이 될 수 있는지 전혀 모르는 채였다.

주입식 교육의 폐해 중 하나는 바로 '매뉴얼'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기 힘든 어른이 된다는 것이다. 항상 교과서, 규칙이 있던 학교 생활을 마치고 나면, 특별한 매뉴얼이 없는 사회 생활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맞는 것인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보통의’ 인간으로 사회에 녹아들어갈 수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조금 과장적이지만, 저자 역시 어려서부터 사람들 사이에서 평범하게 녹아들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래서인지 모든 것이 정확하고 매뉴얼만 따라가면 최고의 직원으로 인정받는 ‘편의점’이라는 특수한 공간이 그에게 꼭 맞는 직장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람마다 자신에게 꼭 맞는 인연이 있듯, 나는 직업에도, 직장에도 그런 인연이 있다고 믿는다. 내가 가장 나다울 수 있는 공간, 그런 면에서 나는 지금 내 직장이 그렇게 싫지 않다. 어느 정도 만족하고 어느정도 마음에 든다.


특히 말투에 관해서 말하자면, 가까운 사람들의 말투가 나에게 전염되어 지금은 이즈미 씨와 스가와라 씨의 말투를 섞은 것이 내 말투가 되어있다. 대다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 내 말투도 누군가에게 전염되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 전염하면서 인간임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역시 사람은 모든 것에 영향받고, 모든 사람들과 부딪치고 어우러지며 만들어진다. 나 역시 그렇다. 내가 살면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만들었다. 지금의 나를 잘게 쪼개어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 나열할 수 조차 없을 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거쳐갔을 것이다. 미처 내가 이름을 대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심지어 한번 만나기만 한 인연이라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사람에게조차 나는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던진 한마디를 평생 신경쓰며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고, 언젠가 그녀가 무심코 했던 말 한마디에 트라우마가 생겨 나도 모르게 하나의 습관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받아왔다. 그리고 다시 생각한다. 나라는 사람이 또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줬을지. 내가 미처 알지도 못할만큼 또 얼마나 많은 상처를 줬을지. 어느 것 하나 신중하지 않으면 안되고, 어느 사람 하나 소중하게 대해주지 않으면 안되는 세상이다.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으면 그런 곳에서 일한다고 멸시당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나는 그게 몹시 흥미로워서 그렇게 깔보는 사람의 얼굴 보는 걸 비교적 좋아한다. 아, 저게 인간이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자기가 하는 일인데도 그 직업을 차별하는 사람도 가끔 있다.
(...) 무언가를 깔보는 사람은 특히 눈 모양이 재미있어진다. 그 눈에는 반론에 대한 두려움이나 경계심, 또는 상대가 반발하면 받아쳐줘야지 하는 호전적인 빛이 깃들어있는 경우도 있고, 무의식적으로 깔볼 때는 우월감이 뒤섞인 황홀한 쾌락으로 생겨난 액체에 눈알이 잠겨서 막이 쳐져있는 경우도 보았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을 멸시하고 깔보았는가. 나는 부끄럽게도 무의식적으로나마 사람들을 멸시하고 그로 인한 나의 우월감을 느끼며 뿌듯해했던 적도 많다. 물론 그또한 상대적이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아래에 있거나 못하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하고 내가 더 우월하다는 말도 안되는 자신감에, 존재가치를 느끼거나 성취감,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전 독서모임에서도 한 분이 남들로부터 비교하는 것으로 얻는 ‘우월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는 한 마디를 했지만, 나는 그 '우월감'이라는 단어만으로도 내가 부끄러웠다. 무슨 조선시대 양반도 아니고 실제 있지도 않은, 보이지도 않는 계층 따위 같은 것으로 사람들을 나눠 내가 그 위에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니. 자존감은 그렇게 얻는 것이 아니건만, 사실 나는 자존감을 어떻게 얻는 것인지 정말 나를 사랑하는 게 무엇인지 배우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전만 하더라도 무조건 남들보다 잘해야하고 남들에게 인정받아야하고,... 나의 삶의 기준이 내가 아니라 ‘남들’이라는 바깥 시선에 더 집중되어 있었다. 그렇게 남의 눈치를 보느라 나는 얼마나 더 소심해졌으며, 얼마나 더 소극적이며 얼마나 더 무모하지 못했는가. 지금이라도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이 있는가 적어봐야겠다.



야단치는 건 ‘이쪽’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지만 ‘저쪽’에 있는 언니보다는 문제투성이라도 ‘이쪽’에 언니가 있는 편이 여동생은 훨씬 기쁜 것이다. 그쪽이 여동생한테는 훨씬 잘 이해할 수 있는 정상적인 세계다.


사람들이 그렇게 ‘인싸’가 되고 싶은 이유. 그렇게까지 ‘정상’인척, ‘이쪽’ 무리에 있고 싶어하는 이유. 씁쓸하다. 아웃사이더, 인사이더라는 말이 아무렇지 않게 오가는 현실이. 함께 보듬는 것이 아니라 이쪽 저쪽을 나누고, 보통의 인간, 그리고 비정상의 인간을 가르고, 무리에 도움되는 인간, 무리에 속한 인간으로 구분하는 우리가.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 게이코는 정말 '이상한'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그를 '비정상'적인 범주에 넣어 맘대로 판단한 것처럼, 나도 내 기준대로 그를 판단했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쓴 웃음을 지었다. 누구보다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했던 그의 모습은, 어쩌면 나의 모습이었다. 세상의 부품으로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우리의 모습이었고, 어떻게든 보통의 '정상'적인 범주에 들려고 하는 작은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얼마나 자만했는가 돌아보았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게이코를 비정상적이라며, 우리 세계에 속하지 않는 사람으로 분류했지만, 세계의 한 '부품'으로서 가장 잘 살고 있는 사람은 게이코였으며 그 누구보다 '정상'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렇게 세상의 한 부품으로서의 역할과 존재가치를 인정받고 싶어하는 '비정상적인' 게이코였고, 한편으론 세상에 열심히 살아가는 그런 게이코들을 손가락질 하는 '정상적인' 사람들 중 한 사람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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