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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린 Jan 27. 2019

나는 집앞에서도 여행자가 된다

일상을 여행처럼 살아가는 방법


@Colombia city, South Carolina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몰스킨에 펜 한 자루, 그리고 진한 커피 한 잔이면, 나는 어디서든 여행자가 된다. 지난 1년동안 직장인이 아닌 여행자로 살면서, 나는 다이어리를 펼칠 수 있는 작은 탁자만 있으면 어디에서건 다이어리를 펼쳤다. 작은 스탠드 불빛이어도 좋고, 커피 한 잔까지 곁들일 수 있다면 더욱 좋았다. 오빠보다 조금 일찍 눈이 떠진 어느 날 아침 숙소 식탁에서, 하루종일 돌아다니다 다리가 아파 겨우 들렀던 작은 카페에서, 따뜻한 햇살에 못 이겨 공원에 털썩 주저앉아 일광욕을 하고싶었던 오후에도, 배부른 배를 두드리며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도, 나는 늘 뭔가를 적었다. 그건 그날의 인사이트를 기록한 메모이기도 했고, 나조차도 몰랐던 낯선 감정을 털어놓은 일기이기도 했고, 우리의 여행 계획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늘 적는 습관을 들여서일까. 한국에 온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나는 한국의 평범한 직장인으로서의 일상으로 복귀하고, 지난 여행이 까마득할만큼 적응도 다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겨우 한뼘 만한 몰스킨과 진한 아메리카노 한 잔과 함께면, 나는 어디서든 여행자가 되었다. 집 앞 카페에서도 몰스킨에 끄적이다보면 문득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볼 때가 많아졌다. 콜롬비아 어느 작은 카페에 와 있는 것 같고, 문 밖을 나서면 알아듣지도 못하는 외국어들이 쏟아져 들려올 것처럼 느껴질 만큼, 나의 모든 감각들이 깨어나는 느낌이 새삼 낯설다. 그게 혀 끝에 맴도는 커피향 때문인지, 하루종일 두드리던 키보드가 아닌 펜 끝에서 써지는 글자 하나하나가 괜스레 낯설게 느껴지는 것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건 나 자신에게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이 순간, 내 손은 나의 머리가 아니라 내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매일 반복되는 회사 생활에서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어디 5분이라도 있었던가. 내 마음은 돌보지않고 머리만 쥐어 터져라 쓰고 있으니, 마음이 곪아 가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사람들이랑 부딪치면 아프지, 마음이 아니라 머리로만 이해하려고 하니까.  


나의 마음을 들여다 보는 지금,  여기가 지구 반대편 어느 여행지가 아니라 집 앞 카페라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여행지에서 나를 더 들여다볼 수 있는 이유는, 평소 보거나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보는 낯선 경험들을 통해 느끼는 것도 많을 테지만, 무엇보다 현실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걱정하며 받는 스트레스가 없으니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할 수 밖에. 나 역시 여행가기 전에만 하더라도, “여행가면 나 자신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었다. 그걸 왜,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까. 나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서나 생각은 할 수 있고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데. 아니, 사실 어려운 일이다. 처음이 어렵지, 한번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연습을 해 본 사람은 안다. 여행지에서만 해야 하는 게 아니라, 일상에서 더 마음 보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일상에서도 행복하려면, 걱정하는 시간을 덜어내면 된다. 걱정을 많이 한다고 일이 빨리 풀리는 것도 아니고, 내 속만 상한다. 차라리 내 마음이라도 추스리고 여유를 가지면 문제에 부딪칠 수 있는 힘이라도 생긴다. 나처럼 걱정이 앞서고 마음도 약해빠진 사람은, 문제에 부딪치면 뒤로 나자빠지고 혼자 울면서 절망하기 쉽다. 일상 속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있겠냐만은, 여행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적어도 스트레스를 오래 갖고 있지 않고 금방 털어내고 다음날 다시 설레는 기분으로 출근하는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어차피 부딪쳐야 할 일이라면 부딪쳤을 때 뒤로 넘어가지 않을만큼 마음을 단단히 먹고 웃으며 출근한다. 그런데도 출근하기 싫거나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면, 출근 전 30분 정도 카페에 들러 다이어리를 펼쳐 기분좋은 계획들을 짜거나 소설책을 읽는다. 지금 내 일상이 아니라 나를 다른 세상으로 데려다 놓을 수 있는, 소설 속 세계에서 나는 마음껏 유영한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조금만 바꿔도, 내 일상은 충분히 낯설어질 수 있다. 통근버스 놓칠까봐 매일 뛰어가던 일상이지만, 오늘 하루 딱 5분만 일찍 나와도 오늘 하늘 색은 어떤지 구름은 무슨 모양인지 반짝이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출근할 수 있다. 내 발자국 소리도 들어보고 차가운 바람을 손에 쥐어도 보면서, 그렇게 출근하다보면 아침에 기분 좋지 않을 이유가 없다. 매일 반복되는 직장생활이 아니라, 어제보다 한번 더 동료에게 웃어보일 수 있는 오늘을 산다면 나는 분명 어제보다 조금 더 성장했고 조금 더 나은 오늘을 살고 있는 것이니. 이렇게 생각하면 어느 것 하나 감사하지 않은 게 없다. 여행이 끝났다고 해서 여행을 그리워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느 여행 커뮤니티의 ‘일상을 여행처럼’ 이라는 문구처럼, 나는 이미 일상을 여행처럼 살고 있었다. 지금에 감사하고 여기에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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