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y Nov 23. 2023

이럴 가치가 있어?

발리 2023 7/9

굳이 계단식 논을 보러 멀리까지 가고 싶진 않았다. 우붓 중심가에서 멀지 않은 자리에 위치한 Kajeng rice field 정도면 산책하러 가는 마음으로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첫날에 내린 비를 뒤로하고 날씨도 맑고 그리 덥지도 않으니. 구글 지도에 나온 길을 걷다 보면 좁은 길이 나오다가 다시 옆의 큰길로 합쳐지니 해질 때쯤 그 길을 쭉 돌아 걸어나오면 되겠지. 계획은 짧고 간단하다.


그 길을 걸었다. 계획대로.

하늘은 화창하고, 연날리기가 끝났는지 손에 연 하나씩 들고 자전거를 타고 내려가는 아이들을 지나쳐서 언덕길을 올랐다. 지도상 좁아지는 길에 들어서자 풀이 좀 더 우거져 있다. 사람들이 많이 안 걷는 길인가. 계속 걷다 보면 주변에서 함께 걷던 사람들도 어느새 보이지 않는데, 중년 커플이 내 뒤를 멀찌감치 따라 걷고 있다. 야 너도 구글 지도 봤지? 나도. 앞에 놓인 돌길을 징검다리 건너듯 한 발씩 걷다 보니 어느새 정글을 걷고 있는 느낌이다. 


뒤를 돌아보면 그 커플은 아직도 뒤에 있고, 그게 마음이 놓여 계속 걸었다. 그러다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안들 수 없는 구간이 나온다. 한발씩 교차해서 걸어야 할 좁은 폭의 돌길 옆 왼쪽은 말 그대로 절벽이다. 십 미터는 족히 넘어 보이는 낭떠러지. 오른편에선 지난 며칠간의 비로 불어난 물이 쏟아져 흘러 그 절벽 아래로 떨어지니 이게 폭포야 댐이야. 계속 가는 게 맞아? 싶은 마음에 뒤를 돌아보니 중년 커플도 망설인다. 

남자가 먼저 건너본단다. 느릿느릿하지만 무사히 건너서는 아내에게 손짓하니, 못 가겠다고 하신다. 결국 남자가 다시 절반을 돌아와 손을 내밀어 같이 건넌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네. 짧은 순간 갈등이 된다. 여기까지 왔다고 이걸 꼭 계속 가야 하나. 저 좁은 물길을 건너서? 그 옆은 낭떠러진데?? 떨어지면 잘돼야 골절이고 앰뷸런스도 진입 못 할 것 같은데? 이게 맞나 싶은 강렬한 감각을 느끼며 한 발씩 걷다 보면 신발이 젖어 더 조심스럽다. 이딴 일에 목숨 걸 가치가 있나. 고작 몇분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무사히 건너서 농담을 건넸다. 내 생각에 우리 엄마가 지금 날 그리 자랑스러워하진 않을 거 같아. 멍청한 짓을 함께 한 셋이 같이 웃고 나선 남은 길을 계속 걸었다. 선셋이고 나발이고 구글맵을 한 번씩 확인하며. 몇시간전까지 고급지게 갤러리 안을 걷다 이게 뭔짓이야.

  
지도에 나온 대로 옆길과 합쳐지는 구간. 비탈길을 힘들게 올라가야 나온다. 구글맵이 틀리진 않았어. 하지만 이걸 이어지는 길이라고 하는 건 좀 사기지.
그 길을 걸었다. 예상과는 아주 다르게. 논밭길을 걸으려다 정글 탐험을 했다.


살아?돌아와서 찍어본 그 길. 풀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물이 떨어지는 그 아래로 십여미터는 족히되는 낭떠러지였다. 저길 왜 걸었지...?



서로의 여정에 행운을 빌어주고 돌아서면, 다시 생각해도 죽다 살아난 기분인데. 강렬한 수분 섭취 욕구가 든다. 높은 지대에 자리한 카페/펍/(알고 보니 숙소)에 자리 잡고 발리 첫 코코넛 주스를 들이켠다. 쭉쭉 들어간다. 갈증이 가시자, 논밭 뷰도 비로써 다시 보이고, 바텐더/주인장의 고양이한테 아는 척도 한번하고, 대화도 시작된다. 우리 둘 다 내가 헤쳐온 저 길은 위험 사인을 붙어야 한다는 데 강력히 동의했다.

대화 중간중간 요상한 울음소리가 끼어든다. 게코(gecko: 도마뱀)가 게코인 이유. 큰 도마뱀만 그렇게 크게 운단다. 정말 그렇게 운다 게코, 게코하고.


여기선 스몰톡을 해도 마음이 편하다.

'내가 진짜 입에 풀칠하려고 할 수 없이 입 연다'는 마음으로 억지로 영어 쓰고 살다가,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헬로우"를 던지는 밝은 톤에 스스로 놀란다. 나만 이방인인 채로 살다 모두가 이방인인 곳에 있어서일까? 마음도 너그러워진다. 먼저 말을 건네고 싶고 말투에 웃음기가 섞인다. 

사실은 영어를 쓰는 거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일할 때 써야 하는 게 문제였던가. 왜 21세기에 주 5일을 일해야 하는데. 왜 4일이 아닌데? 빨래 널고 개켜주는 로봇도 없는 시대에, 왜 AI가 대체하는 직종은 원래의 예상과 달리 예술과 창작의 영역이 먼저인데? 굳이 영화 속 터미네이터의 세계관을 직접 확인해 보고 싶어 하는 인류는 뭐가 문제인가. 잡념이 끊이지 않는다.


논밭에 기울어지는 노을을 바라보다, 날마다 이런 풍경을 보는 거야? 멋진 삶이다. 다시 말을 꺼낸다. 이 풍경에 반해서 매년 다시 돌아오는 여행객이 지금도 숙소에 머물고 있단다. 숙소가 있었어? 그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펍의 뒤편에 위치한 숙소를 보여준다. 한적한 풍경에 소음이라고는 풀벌레 소리뿐.
또 보자 인사를 건네고 다시 길을 나선다.
어두워지는데 또 밥은 먹어야지. 구글 지도야 길을 보여줘.



작가의 이전글 Intro. 발리 인 더 하우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