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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바라기 Apr 17. 2024

유리창 대청소

- 나의 테리우스, 겨울을 널다

중학교 1학년  무렵, 새마을운동의 바람을 타고 전국의 집들이 새로 지어졌다.

우리 집도 오래된 한옥을 허물고 열여덟 평의 아담한 양옥집을 지었다.

평생의 보금자리를 새로 지으신 아버지께서는 집에 대한 애착이 강하셨다.

보물 다루듯 애지중지하신 터라 일요일 오전에 온 가족이 유리창을 닦게 되었다.

하지만 너무 싫었던 건, 하필 그 시간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TV만화 '캔디' 방영시간이라는 거.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어."

캔디를 백허그한 채, 긴 머리칼을 흩날리며 읊조리는 테리우스를 뒤로 하고 유리창을 닦으러 가며, '내 시간도 멈춰버렸으면 좋겠다'는 시답잖은 생각도 했던 것 같다.

투덜대며 나오기는 했지만 유리창 닦는 일은 제법 즐거웠다.

처음으로 가져 본 내 방, 네 개나 되는 큰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을 받으며 창을 닦노라면 꽤나 심각하게 느껴졌던 사춘기의 이런저런 고민들이 싹 다 지워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적당한 육체의 피로가 정신의 고통을 잊게 한다.

아버지께서 의도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효과적인 치유법이었다.


봄맞이 대청소를 하다 옛 생각이 났다. 가족들 모두 창틀에 매달려 신문지며 천 쪼가리를 들고 반들반들 윤을 내던 그 시절이 그립다. 아버지의 주말청소는 가족 모두 함께 하는 방식이었지만 나는 다르다. 각자 삶에 바쁜 가족들에게 부담주기 싫어 늘 혼자 감내한다. 아버지처럼 하고 싶지만 실행이 쉽지 않다. 길었던 겨울이 지나고, 어느새 봄마저 기울어 가는 지금에야 늦은 겨울 털어내기를 혼자 하고 있다.


겨울을 널다


햇살 부서지는 소리 요란한

초봄의 베란다에서

겨우내 깊은 잠에 들었던 먼지가

풀씨처럼 날아오른다


엄마는 무얼 하고 계실까?

앞서 맞이한 봄볕에

묵혔던 겨울을 털어내고

텃밭에 가꿀 푸성귀들을

심으셨는지도 모르겠다


당최 부지런함이라곤 없는

도시의 딸은

이제야 겨울 보낼 채비를 한다


겨울 이불을 차례로 널어

죄다 봄햇살에 떠넘기고

미워했거나 좌절했거나 슬펐던

케케묵은 감정까지

슬며시 끼워 보낸다


봄햇살 다 부서지기 전에 서둘러

겨울을 널다



아, 부모님께서는 지금도 그 집에 살고 계신다.

몇 년 전 창틀까지 새로 갈아 끼웠고, 창에는 시트지를 붙여 크게 창을 닦을 일도 없다.

하지만 쨍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와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건 여전한 우리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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