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실연
아들의 실연
아들 녀석이 전화로 울먹였다. 눈물을 잘 보이지 않은 녀석이라 큰일이 일어난 줄 알고 이유를 자꾸 캐물어도 대답은 없었다. 엄마가 이런저런 이유가 될 만한 걸 물어대자 녀석은 머뭇거리다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고 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라 순간 당황했고 이별 통보를 받은 아이의 심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싶었다.
이내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 상실감이 어떤 것인지, 세상을 다 잃은 느낌과 세상을 혼자 짊어 메고 있는 듯한 무게감이, 세상을 혼자 앓고 있는 듯한 그 절절함이 오롯이 전달되었다. 그 나이 때는 사랑을 잃는다는 것이 인생을 통틀어 잃은 것과 맞먹는 것이 아닐까.
고등학교 때 사귀던 사람과 대학 1학년 때 헤어지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사귀던 사람이라 그 사람이 내 전부가 되었고 세상 전부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오직 그 한 사람에게만 매달렸다. 그런데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는 말처럼 우리는 물리적인 거리를 뛰어넘지 못했다. 그 이유만은 아니었겠지만 뚜렷한 이유 없이 소식이 뜸해지고 두절 되더니 그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의 전화번호는 없는 번호가 되었고 살던 집에서도 더 이상 살지 않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린 그 시절에 서로가 인연이 아닌 것을 알아차렸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는 그걸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세상이 무너져 내린 것 같았고 새로운 인연이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실연의 사실을 잊기 위해 한동안 술을 마시고 담배를 배웠다. 혼탁한 정신이 이별한 사실을 조금씩 잊게 했고 시간이 약이 되었다.
실연한 녀석에게 어떤 말이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차라리 물리적인 힘을 이용하여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같이 술을 먹자고 할까. 아직 담배를 하지 않은 녀석에게 담배도 가르쳐 볼까. 신촌에서 광역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고 있다는 녀석을 기다리면서 그렇게 실없는 생각들을 했다. 집안으로 들어서는 녀석에게 술이나 마시자고 제안을 했더니 술 생각은 없는지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사실 아이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 아까의 기죽은 목소리와는 달리 의연해 보여서 마음을 단단히 고쳐먹었나 싶었다. 조금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러던 아이가 거실을 서성거리다가 갑자기 눈물을 보인다. 엄마에게는 안 보이려고 무진 애를 쓰는 것이 느껴졌다. 저도 제 속을 알 수 없는 모양이다. 아이가 조금은 멍해 보였고 우울해 보였다. 입을 다물고 아이가 말을 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저 아이를 한 번 안아주고 등을 두드려줬다. 차려놓은 호박죽이며 요구르트를 먹지 못하고 아이는 제 침대에 들어가 누웠다. 따라 들어가서 등을 토닥여주고 있는데 아이가 숨이 안 쉬어진다고 벌떡 일어난다. 공황장애가 오는 것 같았다. 갑자기 겁이 났다. 이대로 둬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방법이 없지 않은가. 가는 인연이 있으면 오는 인연이 있어 또 다른 사랑이 구멍 난 가슴을 메꿔주지 않는 한 실연의 아픔은 오래 갈 것이다. 아이가 다시 침대에 눕는다. 옆에 누워 그저 안아주고 등을 두드리고 하면서 감정이 추슬러지기를 기다렸다.
녀석은 여자 친구와 한 번 헤어진 적이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사귀다가 헤어지고 다시 중 3학년 때 만난 걸로 알고 있다. 아들의 입으로 여자 친구를 사귀는 걸 들은 것이 아니라 아들 친구들이 슬쩍슬쩍 흘린 걸 들어 알게 되었다. 여자 친구 얼굴도 사진으로나 봤지 실물은 보지 못했다. 딱 한 번 녀석이 여친과 함께 있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 10시가 넘은 늦은 밤이었다. 고 3인 녀석의 생일 날이었다. 아파트 근처 벤치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놀이터로 뛰어드는 남녀가 있었다. 둘은 만나자마자 서로 껴안고 난리가 났다. 어둠 속에서도 시커먼 가방이 낯익다고 느꼈는데 아뿔사, 남학생의 모습도 낯설지 않았다. 아들이었다. 민망해할까 봐 나는 자리를 금방 떴다. 그런데 녀석도 꽁무니를 뺀 사람이 엄마인 걸 알아본 모양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둘 다 그 일에 대해 함구했고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여자 친구 얘기가 나와서 내가 그때의 일을 꺼내며 아이를 놀렸던 적이 있다.
그런 여자 친구를 녀석은 주말이나 주중에 만나러 나가곤 했다. 나로서는 환영할 일이었고 아이에게 삶의 활기를 심어주는 여자 친구가 고맙기까지 했다. 자식의 연애 사업에 간섭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에 아들의 선택을 존중했다. 안 지는 8년이고 사귄 지는 6년이다. 그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을 터인데 둘 사이에 표나게 갈등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 무슨 연유로 헤어지게 되었는지 묻지 않았다. 헤어진 마당에 그게 중요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6년이라는 시간이라면 사랑이 아니어도 정이 넘칠 만큼 들 세월이라 이별의 상처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아이의 인생이 바뀌는 사건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복잡했다.
여자 친구에게서 왜 전화를 했냐는 카톡이 온 것으로 봐 녀석이 통화를 시도했던 모양이다. 녀석은 11시 가까이 넋 놓고 누워있더니 전화를 해봐야겠다며 정신을 차리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방 밖으로 나오면서 잘 해 보라고 어깨를 두드렸다. 같이 있었던 고양이 맹이와 방을 나와서는 방안 돌아가는 사정이 궁금해 문밖에 바짝 기대어 네 다리를 하고 엎드렸다. 여자 친구가 전화를 받는지, 받으면 둘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가는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오가는 말투가 거칠지는 않았다. 여자 친구 쪽에서 아들 녀석의 잘못을 따지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아들 녀석이 그것이 오해임을 설득하는 말이 오갔다. 상당히 오랜 시간 토닥토닥하더니 아들 녀석이 우리 헤어지지 말자라는 말을 꺼냈다. 수화기 너머에서 웃음이 터지더니 그러기로 합의에 이르는 게 들렸다. 나는 다리에 쥐가 나서 더 이상 웅크려 듣지 못하고 안방으로 들어와 누웠다.
다음날 부엌에 있었던 호박죽이며 요구르트 그릇이 깨끗하게 비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일주일 넘게 마음 고생을 하더니 거실로 나온 아들의 얼굴이 활짝 폈다. 녀석을 보고 나는 한 마디 했다. 그렇게 절절한데 잘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