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병인의 아침
남편의, 오른 열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극도의 긴장 속에 살고 있다. 살아 있으면서도 사는 게 아니다. 나도, 남편도. 눈을 붙여도 제대로 자는 게 아니고, 눈을 뜨고도 계속 자고 있는 듯하다. 간병 첫날은 몸이 버텨주지만 이튿날이 되면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겹다. 정신적인 피로가 몸을 축내고, 혼미한 정신에 팔다리가 무겁고 거추장스럽다.
아침밥 먹는 일이 곤욕이다.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그래도 간병인 아줌마들 사이에 앉아 억지로 몇 숟갈을 넘기니 기운이 조금 돈다. 아픈 사람을 두고 어떻게 밥이 넘어가나 싶지만, 생존의 본능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다. 죽어가는 이를 돌보는 것은 곧 살리는 일이고, 그 살림을 위해서는 스스로 살아내야 한다. 허기져 쓰러질 것 같으니 먹지 않을 수가 없다.
간병인이고 보호자고 다들 비슷하다. 환자를 돌보느라 잠도 못 자고 끼니도 제때 챙기지 못해 고달픈 몸들이다. 소변, 대변, 환자 특유의 비릿한 냄새, 병실에 스민 고약한 악취 속에서도 수저질은 이어진다. 먹어야 힘이 나고, 힘이 나야 하루를 버틸 수 있으니까. 밥을 뜨다가도 가래 끓는 소리가 들리면 달려가 가래를 뽑아주고, 다시 돌아와 남은 밥을 삼킨다.
처음에는 차마 사람들과 어울려 밥을 먹을 수 없었다. 아픈 사람을 옆에 두고 먹는 것도 미안한데, 마치 소풍이라도 온 듯 떠들썩하게 밥을 먹는 모습이 낯설고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먹지 않고는 이 생활을 버틸 수 없다는 것을. 머리가 핑 돌며 아찔해지니, 환자보다 내가 먼저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먹어야 했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년을 이 생활로 이어가는 간병인들에게 이런 아침이야말로 하루를 버텨내는 힘이다. 밥맛이 없어도 옆 사람이 먹으니 한 숟갈이라도 뜨게 되고, 간병인과 보호자—처지는 달라도 ‘사람을 대한다’는 점에서는 같으니 서로의 마음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물론 환자를 돈으로만 여기는 간병인도 많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직업이고, 그 또한 삶의 한 방식이다.
환경이 아무리 열악해도, 몸은 저 나름대로 살아낼 방법을 터득한다. 병실 풍경을 바라보며, ‘궁하면 통한다’는 옛말이 결코 헛된 말이 아님을 새삼 느낀다
(당신이 떠나기 일주일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