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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상파 Nov 05. 2024

간병일기 후 08

“아들, 아빠 생각 안 나니?” 

잠자리에 누워 녀석에게 묻지 말아야 할 말을 건네고 말았다. 

“생각 나.” 

아이의 목소리가 언덕을 내려가는 듯 미끄러졌다.

“어떤 게 제일 생각나는데?” 

“아빠랑 함께 놀던 것.”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더니 울먹이는 소리가 들린다. 우는 아이를 보니 내 감정도 덩달아 출렁인다. 표현을 잘 안하는 녀석이라 잊고 지내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닌 모양이다. 짠해진다. 나도 아들도. 물어 좋을 것 없는 말을 물었구나. 내 볼 위에도 눈물이 타고 흐른다.


아무리 아이다운 단순함과 건강함으로 아빠의 부재에서 오는 상실감을 이겨내고 있다하더라도 상실된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슬픔은 치유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평생 아이의 마음에 자리를 잡고서 해소되지 않은 결핍으로 남을 것이다. 허전함과 애달픔으로 저려 올 것이다. 고독과 유한성을 안고 살아가야함은 누구나의 숙제이겠지만 소중한 존재의 부재는 그리움과 동시에 상처가 되어 내내 쓰라릴 것이다.


아니, 어쩌면 우린 금방 잊고 새롭게 시작할 것이다. 예기치 못한 순간에 이런 쓸쓸함과 허전함이 종결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울먹이는 아이를 보니 마음이 좋지 않다. 어른인 나조차 남편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데 아이는 얼마나 힘들까 싶다. 함께 했던 사람이 사라졌다는 것, 더는 볼 수도 목소리도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사람을 미치게 한다.


아니다. 어쩌면 어린 것들이 감당해야 할 상실의 무게는 그들이 살아온 나이만큼 가볍고 통통 튀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시린 감성이 아이들의 감정까지 포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납덩어리처럼 가라앉고 있는 이 마음으로 바라보니 세상이 납빛으로 보이는 것은 아닐까. 우린 머물러있는 것 같아도 너무 빨리 달려가고 있고,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아도 너무 빨리 잊어버려, 사별의 고통에서 벗어나 일상의 소소한 일들에 휩쓸려 웃고 떠들며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심연으로 가라앉은 어미의 마음으로 어린 것들을 회색으로 둔갑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엄마의 마음은 요즘 계속 울적하다. 아이들을 가슴으로 품기가 버겁다. 이성보다 감정을 앞세우는 날이 많아지고 있다. 아들 녀석이 그런 엄마를 예리하게 평가한다. 엄마는 자기의 동지가 아니라 적이란다. 녀석이 엄마에게 어떤 기대를 걸고 있었기에 그런 엄청난 말을 내뱉은 것일까. 아이들에게 이해받지 못한 엄마라는 자괴감이 스멀거린다. 가슴 밑바닥에서 계속 불안이 올라오고 나는 목적도 없이 자꾸 조급해지고 소심해진다. 아이들을 볶아대고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다.


아이가 우니 감정이 격해져 눈물을 억제할 수가 없다. 베개 위로 눈물방울이 쉴 새 없이 떨어진다. 먼저 말 하는 사람이 지는 게임을 하는 것처럼 나와 아들 녀석은 말없이 잠자코 누워만 있었다. 녀석이 코를 훌쩍인다. 이 분위기에서 녀석과 대화는 거의 불가능하고 하더라도 울먹이느라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그런 아이가 어느 결에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오후 내내 레고를 가지고 놀더니 피곤했던 모양이다. 나는 녀석 옆에 누워 꼼짝하지 않는다. 감상적인 생각이 날개를 달면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계속 나왔다. 흐느낌이 자는 아이의 귓가에 들릴까 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둠은 사라지고 살아서 함박꽃처럼 웃는 남편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입술로 짭조름한 것이 자꾸 흘러든다. 자는 어린 아들 녀석 옆에서 울고 있는 내 모습이 처량하다. 과도한 자기 연민의 감정에 허덕이고 있는.


잠을 못 들고 뒤척이고 있는데 딸아이가 제 방에서 안방으로 건너왔다. 딸이 잠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녀석이 연신 코를 훌쩍인다. 딸아이도 오늘 집안분위기를 타는 것일까. 우는 이유를 물었다.

“아빠가 보고 싶어.”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상황인 것 잘 알잖아?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냉담을 가장한 체념조의 엄마 말에 아이는 더는 말을 꺼내지 않는다. 딸아이가 잠들 때까지 나는 눅눅한 기분으로 벌을 서듯 꼼짝 안 하고 누워 있었다. 


심란한 밤, 잠은 저 멀리 달아나고 없다. 자는 듯 만 듯 새벽 무렵 나는 화장실 거울 앞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한 여자를 보았다. 눈물범벅의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소리 죽여가며 우는 여자를. 거울속의 그 여자가 이방인처럼 낯설었다. 그 여자를 두고 당신은 어디를 갔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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