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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글 38

단감 한 박스

by 인상파

단감 한 박스


어릴 적 시골집에는,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그 집의 마당 가로 단감나무가 서 있었다. 여름이면 우리는 그 단감나무 아래에 평상을 깔아놓고 무더위를 식히곤 했다. 어둠이 밀려오면 평상은 마당 한가운데로 옮겨져, 모깃불을 놓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저녁을 나누는 자리가 되었다.


그 감나무는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그 집을 지키고 있었다. 우리가 그 집으로 이사 오기 이전부터였으니 이미 몇십 년을 살아온 터라, 감나무의 수령은 아마도 나의 부모 세대쯤 되었을 것이다.

봄이면 그 감나무는 연하고 여린 살빛의 연두색을 피워 올렸다가 이내 짙은 초록으로 물들었다. 봉긋한 시루 같은 모양의 앙증 맞은 허연 감꽃은 어린 우리에게 온갖 놀잇거리가 되어주었다. 실에 꿰어 목걸이도 만들고, 팔찌도 만들고, 손가락마다 끼워 반지라며 까르르 웃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여름. 진한 청록색 잎이 나무를 우거지게 덮을 즈음이면, 감나무는 마치 무더위를 내쫓으려는 듯 짙은 그늘을 내리쏟았다. 그 그늘 아래 놓인 평상은 자연이 마련해준 가장 시원한 장소였다. 우리 가족의 낮과 밤을 품어주는 안식처였다.

그러는 사이 감은 점점 크기를 키워갔다. 공깃돌만 하던 것이 어느새 아기 주먹만 한 크기로 팽창하며 서서히 주황빛으로 물들어갔다. 감잎도 그 빛을 닮아 노을처럼 타올랐다.

서리가 내릴 무렵이면 나는 밤에 몰래 마당으로 나가 감을 ‘서리’하곤 했다. 해거리를 하는 해면 감이 많이 열리지 않아 엄마는 식구들과 함께 먹자고 감을 아꼈다. 주전부리가 없던 때라 방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감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나는 기어이 뻗어오른 감나무 가지를 밟는 걸 감행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어둠 속에서 나무에서 떨어지면 큰일이 났을 텐데,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단감의 달콤한 유혹 앞에서 감나무를 오르는 것쯤은 식은죽 먹기였다. 감나무 가지를 살금살금 밟으며 꼭 한 개만, 딱 한 개만 따 먹겠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어둠 속으로 나갔던 때, 아직도 그 머루빛 어둠이 떠오른다.

안방에서는 아버지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려오고. 그 소리를 들으면 안심을 했다가도, 들키면 도둑 취급을 받을 것 같아 마음이 다시 쪼그라들었다. 제 집에서 제 것을 먹는 건데도 금기처럼 느껴졌던 그 조마조마함. 감 하나 없어졌다고 타박할 엄마도 아닌데, 지금 생각하면 나도 참 소심한 겁보였다. 그렇게 훔치듯 감을 서리하곤 했으니.


그렇게 따 첫입을 베어 물었을 때, 서리 내려 단단해진 감을 통째로 이빨로 깨물면 달콤한 과즙이 허기진 배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혼날까 봐 벌벌 떨던 마음도, 어둠 속을 뒤돌아보던 두려움도 금세 가라앉았다. 그 순간 내 안을 채운 것이 달콤함인지, 안도감인지, 아니면 몰래 따먹는 짜릿함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한 입 한 입이 어린 나의 허기진 밤을 견디게 해주었다.


오늘 시골에서 단감 한 박스가 택배로 도착했다. 사촌 오빠가 단감을 좋아하시던 어머니가 생각난다고 보내온 것이다. 상자를 열자 퍼져 나온 단내에 어릴 적 감나무 아래에서 놀던 일, 허기가 져 몰래 감을 따러 나갔던 순간들이 스르르 고개를 들었다.


지금은 그 집도, 감나무도 자취를 감췄지만, 가을이면 이렇게 단감이 찾아오고, 그럴 때마다 잊고 지내던 옛 추억이 살며시 되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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