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었으나, 외로웠던 사람
유리왕의 <황조가>
왕이었으나, 외로웠던 사람
황조가, 한시와 함께 번역된 한글 시를 마주치고 나서 이 한 편의 시도 내 가슴에서 살았다.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시다.
翩翩黃鳥
雌雄相依
念我之獨
誰其與歸
펄펄 나는 꾀꼬리여,
암수 서로 정답구나.
외로워라.
나는 뉘와 함께 돌아갈꼬.
시는 짧고 단순하지만, 읽는 순간 돌아갈 이가 없는 사람처럼 내 가슴도 저려왔다. 오래 잊고 지낸 외로움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 같다. 더욱이 이 시가 주몽의 아들, 유리가 지은 노래라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면 그 외로움의 강도는 한층 더 가슴 깊이 파고든다.
그렇다면, 유리는 누구인가.
유리는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가 없는 아이였다. 아버지를 알고 자란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으며 자란 사람이었다. 어린 유리에게 아버지는 결핍이었고, 질문이었고, 기다림이었다. 그의 첫 외로움은 떠나는 데서 생긴 것이 아니라, 남겨지는 경험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언젠가 아버지가 자신을 찾으러 올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믿음을 품고 자랐을 것이다.
아버지는 오지 않았고 결국 유리는 스스로 아버지를 찾아 길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고구려에 도착했을 때, 주몽은 그가 진짜 아들인지 확인하기 위해 칼자루를 내밀었다. 유리는 자신이 평생 지니고 온 칼날을 꺼내 맞추었고, 두 조각은 흔들림 없이 하나가 되었다. 그렇게 아버지 주몽을 만났지만, 기쁨은 오래 머물지 못했다. 주몽은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유리는 또다시 남겨진 자가 되었다.
그런 생을 살아온 사람 앞에 사랑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왔을까. 유리는 치희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녀가 떠난 날, 유리는 어린 시절의 결핍의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가 떠나는 뒷모습은 아버지가 떠난 그 기억과 닮아 있었을 것이다.
떠나는 사람의 걸음은 매몰찼고 남겨진 사람에게는 오래된 상처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치희의 떠남은 단순한 실연이 아니라, 유리의 삶에 다시 찾아온 익숙한 외로움이었다. 그는 사랑을 잃은 왕이기 전에, 또다시 상처를 기억한 아이였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황조, 꾀꼬리 한 쌍이었다. 암수는 서로를 따라다니고, 떨어져 있어도 결국 다시 돌아와 한 가지에 앉는다. 그들은 서로에게 머물 자리였고, 그래서 멀어져도 다시 같은 가지 위로 돌아왔다. 유리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한 번도 온전히 누려본 적 없는 ‘머무는 사랑’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래서 <황조가>는 단순한 사랑 노래가 아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부재했던 아이의 외로움, 왕이 된 인간의 고독, 그리고 떠나는 사람을 붙잡지 못한 자의 늦은 후회가 겹겹이 쌓여 남긴 노래다. 왕이었지만, 외로웠던 사람, 유리. 사랑은 왜 제 곁에 머물지 않는지, 이제 누구와 함께 돌아가야 하는지를 자문했을 터다.
유리의 외로움은 지금도 이천 년의 시간을 건너 독자의 가슴을 흔든다. 오래전에 쓰였지만 그 외로움은 조금도 낡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붙잡지 못한 순간의 허망함, 말로 표현되지 못한 후회의 떨림, 남겨진 자의 무력함. 그 감정은 시대를 잊었고, 시는 그 외로움을 대신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황조가>는 단순한 옛 시가 아니라, 사랑을 경험한 인간의 오래된 기록이다. 우리는 그 시 앞에서 그저 한 사람의 외로움에 귀 기울이게 된다. 그것은 그가 어떤 지위에 있고 어느 시대에 살았는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사랑 앞에서 우리는 모두 비슷한 상처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유리처럼, 인간은 떠난 사람을 그리워하며 살아가게 된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런 그리움이 없다면 우리는 사랑을 기억할 수 없고, 사랑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