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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록 74

저만치 피어 있는 꽃을 바라보는 마음

by 인상파

김소월의 〈산유화〉


저만치 피어 있는 꽃을 바라보는 마음


김소월의 많은 시 가운데 가장 담백한 작품을 고르라면 나는 〈산유화〉를 떠올린다. 〈진달래꽃〉이나 〈초혼〉처럼 정한의 감정이 짙게 흐르는 작품들에 비하면 이 시는 감정의 결이 훨씬 옅다. 그런데 그 옅음이 이상하게 머릿속을 헐렁하게 만들면서 어딘가 잡히지 않는 여운을 남긴다. 꽃이 피고 지는 단순한 풍경을 그린 듯 보이지만 정작 그 꽃은 색도 향도 생기도 없이 마치 흐릿한 수묵으로 그려놓은 듯한 존재로 다가온다.


처음에 나는 ‘산유화’를 진달래나 철쭉처럼 어떤 꽃의 이름으로 읽었다. 모르는 꽃 이름이 또 하나 있구나, 하고. 그러다 한자를 들여다보니 그것은 ‘山有花’, 즉 산에 꽃이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말한 제목이었다. 구체적인 꽃 이름인 듯 보이지만 실상은 아무 꽃이나 될 수 있는, 혹은 어떤 꽃도 아닌 이름.


시인은 아마도 독자의 이런 작은 착각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제목은 우리를 특정한 꽃의 형상으로 이끌어 놓고는 정작 시 안에서는 끝내 그 꽃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 비어 있는 자리가 오래 마음에 남는다.


그런데 소월은 종종 자연의 구체적 형상을 흐릿하게 두고, 그 자리에 감정의 그림자만 비추어 놓는 방식을 즐겨 썼다. 〈산유화〉 또한 그 흐름을 이어가는 듯하다. 꽃이 어떤 모습인지 숨김으로써 독자는 ‘보이지 않는 꽃’을 스스로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대부분은 돌아오지 않는 사람, 붙들지 못했던 마음, 혹은 말하지 못한 슬픔 같은 것들이 자연스레 스며든다.


시 속의 ‘산에서 우는 작은 새’ 역시 단순한 자연이 아니다. 소월의 많은 시에서 자연물은 늘 한 사람의 마음을 비스듬히 비춰주는 자리였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그 울음은 어쩐지 사연이 있어 보인다. 산에 사는 새가 아니라, 누군가를 기다리며 울고 있는 마음이 자연 속에 투영된 것처럼 들린다. 새의 울음이 설명 없이 놓여 있을 때, 그것은 오히려 더 깊은 슬픔의 기척으로 다가온다.


그렇다면 무엇이 시인의 시선을 ‘저만치 혼자’ 있는 꽃으로 향하게 했을까. 자연은 피고 지고, 지고 피는 일을 끝없이 반복한다. 그러나 인간사에서 떠난 이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비가역적인 이별 앞에서 꽃의 순환은 도리어 마음을 더 허무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기에 시인의 눈에 비친 꽃은 산의 생기있는 풍경이 아니라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이를 대신하는 자리처럼 보인다.


꽃은 저만치 혼자 피어 있을 뿐이고, 새는 그 근처 어디에서 울고 있지만, 둘 다 결국은 한 사람의 빈자리를 말없이 둘러싸고 있는 형상 같다. 자연은 매년 다시 피고 다시 우는 법이지만 사람의 이별은 자연처럼 순환하는 법이 없이 단 한 번의 단절로 영원히 끝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는 것은 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나지도 못하고 새처럼 울지도 못하는 말 없는 그리움와 회한뿐이다.


그래서 〈산유화〉는 꽃을 노래한 시가 아니다. 시인의 마음이 산의 풍경 속에 잔잔히 배어 있는 시다. 그 배어 있음이 너무 희미해서 오히려 더 오래 남는 시.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말하는 시. 소월이 남긴 정한의 흔적 속에서 우리는 저만치 있는 꽃을 바라보며 각자의 잃어버린 사람을,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떠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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