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다고 언제까지 오피서들에게 총질할래?
사람을 살리는 일이 바로 인사야!
경기가 좋지 않다. 경제전망도 암울하다. 실적이 바닥을 친다. 너도나도 구조조정이다. 위험신호가 이미 오고 있다. 큰일이다. 영업이익이 적자다. 여기서 못 버티면 전멸이다. 각종 사업지표를 확인한다. 결국 보드 미팅에서 수익성 낮은 사업들을 정리하기로 결정된다.
고전무의 명이 떨어진다.
"야! HR! 이 사업들 접기로 했으니, 직원들 싹 정리해!"
"네? 정리하라는 게 어떤 말씀이신지.."
"집에 다 보내라구. 위로금 좀 주고 이번 주 안으로 권고사직받아! 여기저기 말 나오기 전에 순식간에 정리해 버려야 돼! 조직개편에 묻어서 진행시켜!"
위에서부터 칼바람이 떨어진다. 대상자들을 추린다. 자그마치 200명이 넘는다. 저 사람들 다 내보내라구?
그렇다. 자본주의란 원래 비정한 법. 회사에게 그들은 이제 제거해야 하는 대상일 뿐이다.
살생부가 적힌 명단을 받은 HR러들은 정리 인원을 나눠 분주하게 움직인다. 숙청 대상자들을 찾아다니며 이미 어지러운 칼춤을 추고 있다.
"회사가 어려워 사업이 정리됩니다. 아쉽지만 위로금 6개월치 받고 나가주셔야겠습니다. 다른 데 갈 데도 없어요. 여기 사인하시면 내일부터 안 나와도 되세요. 이달까지 일한 거로 쳐 드리겠습니다."
"네? 갑자기 이게 무슨 얘기예요? 왜 전데요? 그냥 필요 없어지면 막 나가라 해도 되는 거예요?"
"회사가 어렵다잖아요! 회사가 먼저 살아야죠.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사인 안 하면 험한 꼴 보는 거 알죠?"
멘붕과 자괴감에 빠진 정리 대상 직원들..
그들의 발걸음도 분주해지기는 마찬가지다.
"쓰레기 보듯 똥 씹은 표정으로 사인하고 나가라는데, 이거 어떻게 해야 되지?
"맨날 야근하면서 두 명치 일 한 결과가 이거라니.. 나도 아까 불려 갔다 왔어. 회사 완전 미친 거 아냐?"
"무능한 임원 놈들이 사업 다 말아먹고, 책임은 우리한테 다 떠 넘기는 게 맞나 싶어."
지나가는 길에 절망과 불안에 떠는 직원들의 모습이 보인다. 눈물을 보이는 직원들도 있다.
'아.. 이미 살육이 시작되었구나.. 빠르기도 하네..'
HR 선과장의 손에도 명단이 들려 있다. 할당된 살생부 대상자들이다. 만나서 사형 선고를 해야 되는 이름들이 적혀 있다. 저들은 왜 짤려야만 하는 걸까?
인사란 무엇인가?
사람을 내보내는 것도 인사의 일이다. 까라고 하니 까야겠지.. 이 또한 나 같은 칼잡이 년의 숙명인가?
(관련 글 : 인사가 각성하면 회사에 벌어지는 일)
사업부진의 잘못이 저 사업부 직원들의 잘못인가?
회사는 구제를 위한 노력을 충분히 했는가?
밥그릇 달린 저들 인생의 중대사를 단 일주일 만에?
그것도 일방적으로 목을 치는 게 상식적인 건가?
도대체 위에서는 뭘 하고 있는 거지?
많은 고민과 번뇌가 순식 간에 감돈다.
분명 잘못됐다.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이건 아니다!'
근데 이를 어쩐다? 이걸 처리하기에도 말이 안 된다. 안 하자니 임원들을 상대로 이길 수도 없잖아..
그래. 인사 그 자체에 충실하자! 복잡하게 생각말자.
'내가 아는 인사는 사람을 죽이는 일이 아니야. 사람을 잘 쓰는 일이지. 사람을 살리는 일이잖아.'
살생부 대상자들을 만나 권고사직 면담을 진행한다.
저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얘기해 주자. 그게 최선이다.
"많이 당황스러우실 거예요. 집행하고 있는 제가 봐도 이건 말이 안 됩니다. 여기 도움 받으실 수 있는 연락처들입니다. 권고사직에 사인하는 순간 기회는 없어집니다. 잘 생각해서 선택해 주시구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널리 알려주세요. 계속 시간을 끄시는 게 더 유리합니다. 저도 다른 방법을 좀 찾아보겠습니다."
또..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이걸 나 혼자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 때 마침 현자와 마주친다.
"선과장님. 이게 무슨 일이죠? 집단 해고라니요? 전혀 몰랐는데 어디서 어떻게 진행되는 겁니까?"
"아.. 현실장님. 저희도 이 건이 위에서 갑자기 떨어졌어요. 이번 주 안에 다 정리시키래요. 방법이 없을까 좀 찾아보던 중이었어요.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갑시다. 시간이 없어 보이네요. 누가 뒤에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겠지만, 열심히 일한 직원들에게 총부리 겨누는 이 미친 짓은 막아야죠!"
"갑자기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요?"
"가면서 얘기합시다. 급하게 처리하는 이유는 두 가지일 것 같군요. 잡음 없이 처리하고 싶단 건데.. 대응할 시간을 안 주겠다는 것이고, 세이브시킨 인건비를 자기 실적으로 만들고 싶은 거죠. 회사가 어렵다 해도 남의 인생을 뒤에서 영문 없이 처리하는 건 아닙니다."
"저희가 이걸 막을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음.. 적어도 제니 부사장님이라면 도와주실 겁니다."
제니도 이 일을 듣고 크게 놀란 눈빛이다.
"배후가 누구죠? 누가 꾸민 짓인가요?"
"고전무 라인 같습니다. 고전무가 제안했고 대표님도 허락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제니의 CPU 굴러가는 소리가 울린다. 가늘게 뜬 눈매가 어느 때보다 매서워 보인다.
"현실장님. 언론에 이 일을 흘려주세요. 자극적으로.."
"네? 그럼 회사 이미지가 대외적으로 안 좋을 텐데요? 당장 기자들이 몰려들 텐데, 어떤 이유죠?"
"바로 그걸 노리는 거예요. 이미지 먹칠을 당해봐야 멈출 거니까요. 고전무와 대표님은 제가 직접 해결하겠습니다. 두 분은 대안을 마련해 주세요. 이 상황에서 부진 사업은 접는 게 타당해요. 다만 200명의 정리대상 직원들과 함께 갈 수 있는 방안이 절실합니다."
평소 인원 구조를 꿰차고 있던 선과장이 말한다.
"다른 사업부와 지사에 공석 티오 전환배치로 100명 정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평소 과부하 걸린 사업부에 인원 충원을 하면 50명까지도 살릴 수 있어요."
"음.. 좋아요. 나머지 50명은요?"
"회사가 어려운 사정을 투명하게 설명하고, 육아휴직을 1년 이상 장려하는 동시에 복직 보장과 휴직 장려금을 얹어주면 어떨까요? 휴직 인원이 많아지면 인건비를 아낄 수 있습니다. 휴직자들 자리에 남은 인원들을 배치해 휴직부서 공백이 안 생기도록 하면 나머지 50명도 커버됩니다. 회사 이미지도 더 좋아지고, 직원들도 충분히 이해해 줄 겁니다."
듣고 있던 제니는 선과장을 보며 묻는다.
"의문이 하나 있습니다. 선과장님은 HR팀인데 왜 위에서 지시한 대로 하지 않은 거예요?"
"HR의 본분에 맞지 않아서요. 인사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니까요. 사람과 회사가 조화를 이루게 하는 일이 인사의 본분입니다. 나중에 제게 어떤 불이익이 생기더라도, 누군가는 HR 답게 사람을 지켰다고 선명하게 새기고 싶었습니다. 제 사직서는.. 미리 써 놨어요.."
"그렇군요. 두 분 다 고맙습니다. 저는 어려울수록 회사를 위해 애써 준 직원들과 함께 가겠습니다! 지금부터는 제가 지키겠습니다."
제니 부사장은 대표실로 들이닥쳤다. 밖으로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제니 목소리가 저렇게 컸던가? 도중에 고전무가 호출받아 불려 들어갔다.
"정리 대상 직원, 남은 직원 모두 가슴에 큰 상처를 안을 거예요! 애사심과 열정을 돈 몇 푼과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무슨 일들을 이렇게 하시나요?"
"사업 말아먹은 패잔병들 정리하는 게 뭐 그렇게 대수입니까? 부사장님이 잘 모르시나 본데, 예전에도 어려울 때면 늘 그래왔습니다만.."
"뭐? 패잔병? 그게 말이에요? 사업 말아먹었으면 수장이 책임을 져야죠!! 대표님!! 저한테 뭐라 그랬어요? 좋은 경영자 되라며!! 겨우 이런 거 가르쳐 주는 거야!?"
밖에서 듣고 있던 현자와 선과장.
"우린 더 안 듣고 있어도 되겠는걸요?"
"그렇죠? 부사장님 실력이 생각보다 놀랍군요. 여긴 끝난 것 같으니, 이제 직원들 수습하러 가볼까요?"
결국 사태가 정리됐다. 권고사직안에 서명한 직원들의 사인은 무효가 되었다. 몇몇 직원들은 상처받고 정 떨어져, 그대로 퇴사를 하겠다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에게는 사과 편지와 함께 많은 위로금이 전달되었고, 3개월 간 퇴사유예 기간이 주어졌다.
회사가 어렵다면서 직원들 짤라내는 와중에도 슬쩍 올렸던 임원 연봉은 다시 낮춰 버렸다. 임원들이 받은 성과급은 반강제(?)로 자진반납 되었다.
곧이어 대대적으로 육아휴직과 자기 계발 휴직이 장려되었다. 휴직 신청자들이 늘어났다. 공석 전환배치로 인사팀은 무척이나 힘들었다. 그러나 HR 선과장은 즐거운 표정이다.
짧은 시간 많은 진통이 있었다. 언론 보도가 나가는 바람에 여기저기 취재요청과 디스질로 제니와 현자 역시 수습에 진땀을 빼며 시달려야 했다.
제니는 직원들에게 고개를 숙였고, 대외에 선언했다.
"경우 없이 벌어진 이번 사태로 많은 상처를 입으신 직원들과 그 가족들께 진심으로 죄송한 말씀을 드립니다. 회사는 어떤 경우라도 늘 수고해 주신 직원 분들과 함께 울고 웃을 겁니다. 우리가 사업을 하고 돈을 버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함께 나누고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언제나 함께 가겠습니다!"
업무 과다로 서류 뭉치들이 많이 쌓인 인사팀. 서류더미 사이로 선과장은 모니터에 붙인 포스트잇을 들여다보며 혼자 웃고 있었다.
자신 만의 사자성어라고 한다.
포스잇에 쓰인 문구는 바로 '人人人人'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회사는.. 왜 돈을 왜 버는가?
돈은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사람 없는 곳, 사람 죽이는 곳은 이미 회사가 아니다.
아무리 돈이 돌고 돌며 사람을 현혹시키는, 비정한 자본주의 판일지라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게 하나 있다.
오피스 게임은 바로 사람이 하는 게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