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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맹 Apr 29. 2024

승진했다! 회사의 진급 박스오피스

승진이 공평하지 않은 이유


진급은 알아서 해야 되는 것이다!


오피서들이 가장 환희와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일까? 아마도 승진일 것이다. 그동안의 사냥질을 인정받는다. 레벨이 오른다. 월급이 훅 오른다. 높은 물가도 이때 따라 잡힌다. 살림살이가 나아진다.

 

어디 그뿐인가? 사회적 지위가 상승한다. 사내 입지가 높아진다. 무엇보다도 그 순간만큼 내가 잘 나간다고 느끼게 된다. 다 내 것 같다.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 그렇다. 승진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인사제도 설명회. 진급 대상자들의 눈은 번쩍인다.


매년 진급 시즌, 승진으로 레벨을 올리면 많은 보상이 뒤따라 온다. 프로야구 선수들은 FA 시즌 전년도가 성적이 가장 좋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진급 심사를 앞둔 캐릭터들의 성적이 눈에 띄게 향상된다. 회사의 불가능한 일은 진급 대상자에게 시키면 된다.


대부분의 캐릭터들은 승진 전년도에 상당한 버프를 받는다. 사냥 속도가 빨라진다. 맵에서 보스나 빌런을 만나도 한 방에 줘 패 버린다. 지치지도 않는다. 배터리에 링거를 꽂는다. 야간 사냥이 계속돼도 헤쳐나간다. 포지션이 힐러인데도 극딜을 날려댄다.


이번에는 몇 명이나 진급시켜야 하나?


이 광경을 전지적 시점에서 바라보며 HR은 고민에 잠긴다. 이유는 간단하다. 승진자들에게는 급여를 많이 올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진급 대상자 리스트를 꺼내 고과를 나열한다. 예상되는 승진자를 미리 시뮬레이션한다. 예년보다 많은지 적은 지 따져본다. 그리고 가격이 얼마가 오르는지 계산해 본다.


많이 올라간다 싶으면 진급률을 내려 버린다. 이게 기본이다. 문턱을 높이기 위한 작업들을 곳곳에 해 둔다. 채플 있는 학교에서 배워 온 스킬을 응용한다. 이른바 P/F 스킬(Pass or Fail). 쓸데없이 토익 스피킹이나 오픽 점수를 다시 받아오게 한다. 사내 필수 교육은 다 이수했는지 갑자기 따지기 시작한다. 고과가 아무리 좋아도 조건만족이 안되면 일단 자동 탈락이다. P/F는 오직 떨어뜨리기 위해 존재한다.


이번 승진 니가 한번 양보하자! 내년에 올려줄께!


승진 인원을 미리 정해둔다. 진급심사를 하고 나서 승진율을 체크해야 하지만 반대로 승진율을 미리 정해둔다. 미리 정했다는 것은 이미 계산기를 돌려놨다는 의미로 보면 된다. 여러 진급 대상자를 거느리고 있는 팀장은 고민이 생긴다. 이미 HR에서 다 못 올려준다고 통보를 받았을 테니까..


그래서 소위 고과 밀어주기가 발생한다. 둘 다 못 밀어주면 한 명이라도 밀어줘야 하니까. 자신과 친한 사람을 밀어준다. 한 명은 양보하게 한다. 다음 순번에 챙겨주겠다며.. 그리고 그다음은 오지 않는다. 팀장이 바뀌거나 팀이 개편되면 다시 백지가 된다.


진급 대상자가 되면 모든 것을 불태워 일한다.


한편 이 시즌 임원들에게는 고과가 기록된 승진 후보자 명단이 간다. 본부 내 승진 후보자 중 서열을 1번부터 끝까지 나열하고 의견을 기재하라고 한다. 쭈욱 줄 세우기 해 놓고 "얘 내리고 쟤 올려!" 밀실에서 이렇게 진급 박스오피스 순위를 정하고 있다.


즉 무슨 얘기냐.. 진급심사 기준은 있지만, 그대로 적용이 안 되는 경우가 더 많다는 의미다. 보통은 고과 점수 총합으로 서열이 매겨지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것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뒤집어지기도 한다.


승진 서열은 다음과 같은 사람이 들어간 경우, 고과에 상관없이 순위가 뒤집어진다.

1. 임원이 잘 아는 직원이 대상자에 들어간 경우

2. 팀에서 밀어줘서 팀장 체면 좀 세워주려는 경우

3. 차기 팀장 후보자가 들어간 경우

4. 신임 팀장이 승진 대상자인 경우

5. 몇 번 누락해서 동정표 좀 주려는 경우

6. HR이 승진 대상자인 경우

7. 낙하산이 대상자에 있는 경우

8. 빽이 어마무시한 경우


보통 밀실 박스오피스 순위를 정하고 나면, 약 20~30% 정도는 HR의 당초 예상과 순위가 뒤바뀐다.


진급 인터뷰는 그냥 아무말 대잔치다.


승진은 그 간의 고과 점수를 반영하는 것은 기본이다. 추가로 진급 인터뷰를 하는 곳도 많다. 임원들과 HR이 배석한다. 주로 현재 직급에서 이룬 성과를 말하고, 승진 후 계획과 포부를 말한다. 그리고 질의응답을 받는 순서로 진행된다. 여기서 임원들의 신경전도 벌어진다. 내 새끼는 좋게 얘기해 주고 남의 새끼는 좀 까내리는 것이다.


임원 : (머그컵을 앞에 놓는다) 지금 이 컵 손잡이가 왼쪽에 있습니까? 오른쪽에 있습니까?

초맹 : (오른쪽에 보인다) 정답! 오른쪽이여!

임원 : 허허. 앞으로 대리가 되면 협업이 많고 상대 입장을 고려해야 합니다. 자기 시선에서 오른쪽이라고 하면 되겠어요? 그래서 대리 자격이 되겠어요?

초맹 : (머그컵을 잡으며) 괜찮아영. 전 이 컵을 왼손으로도 잡을 수 있으니깐영! 요로케. 요로케. 히히.


직원 승진에 임원들의 신경전이 벌어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진급 결과가 나오게 되면, 진급률이 좋은 본부의 임원들이 노비들에게 체면을 세우게 되기 때문이다. 진급 PT가 끝났는데, 담당 임원이 먼저 엄지척하며 자기 새끼 칭찬하고 들어간다? 이건 꼭 승진시키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얘는 꼭 올려야겠으니 딴지 걸지 마!'라는 신호다. 이런 경우 보통 다른 임원들도 태클을 걸지 않는다. 그 미뤄둔 태클은 다음 타자에게 간다.


여기 얘 내리고 쟤 올려! 승진 박스오피스 순위가 바뀐다.


서류 심사와 인터뷰를 거쳐 최종 진급 결과가 발표된다. HR은 자신들도 이해 못 하는 승진 결과를 회사 입장에서 적당히 대변한다. 승진에 실패한 노비들. 분노의 이의제기를 날려본다. 그런 그들을 '내가 그런 거 아냐.'로 돌려보낸다. 방어전에서도 HR은 빛난다. 패자는 절대 부활시켜 주지 않는다. 왜 떨어졌는지도 알려주지 않는다. 아니 실은 자기들도 모른다. 굳이 알 필요도 없다. 누가 진급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돈은 맞췄으니 됐다.


우린 승진 다 떨어지고 팀장이 뭐 한거야 대체?


진급 발표가 나면 곳곳에는 희비가 엇갈린다. 누군가는 환호를 지르고 누군가는 말이 없어진다. 한 달 정도 승진 회식에 축하 분위기가 뒤를 잇는다. 거래처에서 인사 방문과 화한이 오기도 한다.


이 무렵 팀장들은 욕을 무척이나 많이 먹는다. 실세 부서는 비교적 진급률이 높다. 반면 그렇지 않은 부서 팀장들은 면을 세우기도 어렵다. 자기네 팀원들은 죄다 죽 쒔기 때문이다. 진급 시즌은 팀장들의 현재 입지가 드러나는 무대이기도 하다.


승진은 운도 많이 작용한다. 회사 실적이 좋은 시즌에는 자비를 베푼다. 승진율을 올려준다. 반면 실적이 떡락 중일 때 걸리면 폭은 좁아진다. 대상자 수도 중요하다. 진급 대상자 자체가 많다? 각 팀 에이스들이 쏟아져 나오면 그만큼 쉽지 않다. 팀을 씹어먹을 정도로 일하고, 사기 스탯을 찍어대며 게임을 지배하고서도 박스오피스 순위는 뒤로 쭉쭉 밀린다.


반대로 대상자 자체가 많지 않은 해에는 승진이 상대적으로 수월해진다. 평타만 쳐도 진급된다. 떨어진 이들에게 회사는 더 노력하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다만 평타도 못 치고 남 탓, 운 탓을 해서는 안 된다. 평타 미만은 대상자가 아무리 적어도 진급시키지 않는다. 그냥 진급자 수를 내린다. 이런 시즌은 HR에게 땡스기빙시즌이다.


의원님! 이번에 따님이 승진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어쨌든 진급은 절대 공평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진실이다. 밀실에서 이루어지는 승진 박스오피스 흥행 순위는 절대 공정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잊은 게 있다.

아주 탁월한 역량을 발휘해도 이길 수 없는 것. 무한한 노력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 우수한 성과도 바로 뒤집어 버리는 것. 치열한 경쟁을 뚫더라도 단 하나 뚫을 수 없는 것.


빽이다! 대한민국의 가장 강력한 치트키는 바로 빽이다. 그 무엇으로도 이길 수 없다. 엄연한 이 게임의 현실이다. 그렇게 매년 승진 시즌. 이유도 모른 채 누군가는 박스오피스 순위에 밀려나고 있다.


P.S. 김대리님의 메신저 대화명이 바뀌었다.

"모두모두 진급 축하드려요.^^*"

대체 저 대화명은 뭔데? 그렇게 불태웠는데 이번에도 진급 밀려버린 김대리님. 충격인가 보다. 축 쳐진 어깨. 하염없는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다. 저분 밥은 드시고 다니는지.. 아.. 뭔가 마음이 짠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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