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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랑한 마시멜로우 Apr 23. 2024

오늘이 가장 행복한 날

50이 훌쩍 넘어, 25년 만에, 우리 대학친구 넷은, 청춘과 마음의 고향 광주에서 감격적인 재회를 했다.

나는 그녀들을 만나기 전, 수없이 많은 꿈들을 꾸었다.

그녀들과 함께 했던 나의 젊은 날들이 더 애틋하고 아련한 모습으로 꿈에서 재현될 때, 나는 그 그리움에 취해 한참을 깨어나지 못하고 다시 눈을 감아버리곤 했다.

이제는 더 이상 꿈이 아닌 현실 속에서 그 그리움을 달랠 수 있게 되었다.


우린 그날, 날밤을 새며 그동안 못다 한 얘기와 지난 세월에 대해 끝도 없는 얘기들을 쏟아냈다.

제 몫을 다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왔던 지난날들을 쓰담쓰담해 주며, 지금이 있기까지 해 왔던 수많은 도전에 박수를 쳐주며, 비로소 우리는 또 한 번의 동지애를 느꼈다.


우리는 80년대 중반, 북구 용봉동 300번지 용봉캠퍼스 안에서 크고 작은 추억과 사연을 만들어 가며 청춘의 한 시절을 함께 보냈다.

서로 의지하고 지지하며, 자칫 단조롭고 메마를 수 있는 캠퍼스 생활에 촉촉한 단비가 되어주자 언약하며 짱친구들이 되었다.


대학 졸업 후, 내가 혼자 고향에 남아 고군분투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을 때 나만 빼고 그녀들은 모두 서울로 상경했다.

정숙이는 명문대 대학원에 진학해 학업을 이어갔고, 선명이는 서울남자와 일찌감치 결혼을 했고, 혜정이는 서울의 한 중소기업에 취업을 했다.


그 후 한동안 우린 연애와 결혼, 아이 출산소식까지 서로의 삶을 공유하며 변함없는 우정을 이어갔다.

그러다 연락이 멈춰졌고, 25년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다시 만남을 갖게 되었다.


정숙이는, 한눈에 봐도 눈에 딱 띌 정도로 '예쁨'이어서 그녀에겐 항상 후광이 비쳤다.

마치 서울서 전학 온 부잣집 아이처럼 흰 피부에 귀티 난 인상이, 평소 내가 꿈꿔왔던 이상형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었다.

그녀는 어딜 가든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에게 호감을 받았다.

나는 하필(?) 그런 그녀와 제일 많은 시간을 보냈다.

동아리 활동도, 아르바이트도, 영어회화도, 취미활동도, 전공실습도 모두 정숙이와 함께였다.

그러다 보니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는 그녀의 인기를 바로 옆에서 직관하는 관람자 신세가 되었다.

지구의 반은 남과 여,,, 어디든 남자들이 있었고, 나는 죽을 둥 말 둥 애를 써도 안 되는 남자들의 관심을 정숙이는 존재만으로도 충분했고 나는 엄청 더 노력을 해야 했다. (사실, 노력한다고 될 일인가? 다시 태어나는 것이 더 빠르겠다 ㅎ)

눈치 없게도 나는 그때 '금사빠 짝사랑마니아'였는데, 내 짝사랑 남정네들이 하나같이 정숙이에게 관심을 보이는 바람에 나는 내색 한번 못해보고 매번 눈물을 삼키며 돌아서야 했다.

그러나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정숙이는 그런 남자들에게 하등 관심이 없었고 자신의 무한 매력과 능력을 발휘하는데 엄청 소극적이었다.

그녀의 유일한 적극성이라면, 내 뒤에 한 발짝 물러나 나를 빛나게 해주는 들러리 역할을 자처한 일이었다. (나란 여자, 참~ 친구 복 하나 오지다 ㅎ)

'x랑이는 뭐든 잘해~, 네가 한번 해봐~ x랑이는 멋진 친구야~'

나는 그런 그녀의 양보와 지지 덕분에 그 시절 크게 주눅 들지 않고 조금씩 빛을 발할 수 있었고 내 앞길을 당당히 헤쳐나가며 4년을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고마움과 별개로, 그녀는 나의 영원한 질투의 대상이며 넘볼 수 없는 워너비인 것만은 변함이 없었다.


선명이는, 대학 졸업 후 맞선을 봐서 운명처럼 한눈에 푹 빠져 한 남자의 여자가 되었다.

나는 갈수록 감당하기 힘든 회사생활로 하루하루를 힘들게 벼텨나가고 있을 때 그녀의 결혼 소식을 들었다. 창살 없는 감옥 같은 회사, 내 능력 밖의 업무와 기대가 너무 버거워 모든 것을 놔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던 그때였다.

선명이의 결혼식 날, 나는 순백의 웨딩드레스와 유럽풍 예복을 입고 나타난 그녀에게서 내가 그토록 바랐던 자유를 보았다.

‘나도 저렇게 결혼하면 지금의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난 왜 이러고 있는 것일까?~ 나를 구제해 줄 남자는 이 지구상에 있기나 할까?’

신혼여행을 떠나는 선명이를 공항까지 마중하고 돌아오면서 나는 다시 돌아가야 할 내 퍽퍽한 현실에 목이 메어 결국 눈물까지 찔끔 거리는 청승을 떨고 말았다.

그러고도 한참을 나는 남자도 없이 골드미스로 남아 꿋꿋하게 회사생활을 견뎌냈다.


나는 길고 긴 노처녀 길을 청산하고 드디어 결혼을 했다.

그다음 해, 혜정이도 늦은 나이에 의사 사모라는 타이틀을 달고 결혼식을 올렸다.

마지막으로 유부녀의 길로 입문한 그녀는 우리의 축하와 부러움을 한껏 받으며 새 삶을 시작했다.

그녀는 결혼과 동시에 곧바로 장군 같은 ‘장군’ 이를 낳아 남부러울 것 없는 꽃길을 걸어갔다.

나는 그때까지 아이가 생기지 않아 불안한 미래를 보내고 있었지만 그녀의 출산소식을 모른 척할 수 없어 아기분유와 기저귀를 챙겨 들고 축하하러 갔다.

부스스 몸을 풀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부러워 도저히 표정관리가 안되었지만 나는 그녀의 뒤늦은 안정과 행복을 진심으로 기원해 주고 돌아왔었다.


그녀들의 삶은 점점 더 승승장구한 것만 같았다.

내가 외롭고 고달픈 매일을 힘겹게 살아내고 있을 때 그녀들은 꾸준히 자신의 희소식을 전해왔다.

능력 있는 서울 남자를 만나 결혼한다는 소식도, 한방에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도, 남편 따라 홍콩지사로 떠난다는 소식도 모두 내겐 꿈같은 일인 듯 요원해 보였다.

나만 홀로 시골 구석에 남아 늦은 나이까지 남자 하나 없이 9년간 집안경제를 책임지고 있을 때 그녀들이 전해준 서울 소식은 내게 반가움과 동시에 좌절이기도 했다.

다들 앞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나만 뒤처져 퍽퍽 기어가고 있는 느낌, 언제 끝날 지 모르는 끝이 보이지 않은 현실 앞에 내 마지막 인내력과 자신감은 점차 기력을 잃어 갔다.

사실, 혼자의 노력으로 할 수 있는 일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공부도 열심히 했고, 우리 넷 중 나만 교사자격증을 취득하고 졸업과 동시에 대기업에 취업도 했다.

하지만 혼자만의 노력으로 되지 않는 것들은 많았다.

어려운 가정환경과 뒷배경은 내 노력으로는 사면초과였고, 누군가의 동의와 선택을 받아야 하는 결혼도 마찬가지인 듯 한계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점점 모든 것이 귀찮고 의미가 없었고 세상만사 켄세라 세라(될 대로 돼라) 심정이 되어갔다.

결국 난, 회사가 바쁘다는 핑계로 자연스럽게 소식을 줄여갔고, 나 혼자만의 긴 잠수로 침잠해 들어가 버렸다.


25년 만에 만난 나를 포함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편안해 보였고, 진짜로 그러하다 말하고 있었다.

명문대 대학원에 진학했던 정숙이는 강남의 유명 상담가가 되어 타인뿐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치유하는 삶을 살고 있었고, 제일 먼저 결혼에 골인한 선명이는 꽃아트 사업가 겸 골프에 푹 빠져 하루하루가 신이 난다며 환하게 웃었다.  

막차를 탔지만 의사 사모가 된 혜정이는 여전히  잘 나가는 사모님이 되어 화려한 인생을 온몸으로 표현하며 나타났고, 뒤늦게 임용에 도전해 중학교 교사가 된 나도 현역으로 열심히 뛰고 있다며 우쭈쭈 말했다.


어찌 보면,,, 우리가 지나왔던 젊은 시절은 서로가 말 못 할 복잡한 속마음도 많았을 것이다.

가장 변수가 많았던 그 시절엔 우리에게 질투도 있었고, 비교도 있었고, 상대적 좌절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 나이가 되어 보니, (청춘인 줄 모르고 지나쳐 버렸던 그 좋은 시절에 대한 아쉬움은 마음 한편에 남겨둔 채), 평준화된 중년여성의 모습으로 서 있는 지금이 바로 우리의 화양연화가 아닌가 싶어졌다.

우리는 모두 꽃처럼 아름다운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 만남을 계기로, 우리는 일 년에 한 번씩 정숙이 게스트하우스에 모여 각자 남은 인생에 대한 마지막 역할을 다하기 위해 힘차게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덧붙여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 되고, 너의 불행이 나의 불행이 된다’는 서로에 대한 우정과 책임감을 또 하나 갖게 되면서 더더욱 잘 살아낼 의무감까지 생겨났다. 

어느 트롯가수의 노랫말처럼 지금 우리는 인생에서 가장 젊고 행복한 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 오늘이 가장 젊은 날~ 행복한 날~’      


덧붙임: 내 브런치 글 사전 검열자인 딸내미가 이 글을 읽고 보내온 답글을 잠깐 소개한다.


딸내미: 엄마, 엄마 글을 읽으면 재밌긴 한데 왜 그렇게 화가 나고 눈물이 차오르지? 

           왜 그렇게 짠하게 산 거야? 

           울 엄마도 젊은 시절에 공주처럼 좀 살지,, 참 많은 것들을 어깨에 짊어지고 살았구나 싶어.

           내가 그때의 엄마 나이다 보니 엄마가 친구 같기도 해서 막 감정이입이 되는 거야.

            ,,,,, 그래서 쫌 울었어 ㅠㅠㅠ  


말랑한 엄마:  아놔~ 너 왜 그러냐? 다 재밌자고 쓴 건데,, 너가 그러면 엄마가 뭐가 되냐?

                  엄마 정도의 고생은 고생도 아니여~~어디다 명함도 못 내민다니까.

                  그리고 지금은 엄마가 제일 잘 나가~ ㅋㅋ

                  ,,,,, 너땜에 나도 괜스레 눈물이 날라고 하잖아 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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