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산책의 미학
점심으로 회사사람들과 감자탕을 먹었다. 원래 거의 뼈만 들어있는 감자탕에 고기가 오늘따라 유독 실하게 들어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고기 한 점 한 점이 매우 크고 맛있었다. 그런데 고기가 너무 맛났던 탓일까. 맛있게 먹다 보니 과식을 해버렸다. 배가 기분 나쁠 정도로 부르게 되었다. 고기가 많고 맛있어서 기분 좋았던 나의 행복감은 배가 엄청나게 부름으로 인해 금세 불쾌감으로 바뀌어 버렸다. 나는 밥을 많이 먹는 편이 아니라서 조금만 먹어도 배가 부른 데다가, 배부른 느낌을 타고날 때부터 유독 싫어했다. 밥을 소화시키지 않으면 오후 내내 배부른 느낌에 이 불쾌함이 가시지 않을 게 뻔했다. 밥을 먹고 회사에 도착하니 아직 12시 28분으로 점심시간이 30분이나 남았다. 일찍 회사에 도착했겠다, 날씨는 춥지만 하늘이 너무나 파랗고 맑아서 조금 걷고 싶었다. 그래서 회사 앞에 있는 공원으로 향했다. 회사 바로 앞에 이렇게 널찍하고 예쁜 공원이 있어서 행운이라고 항상 생각해 왔다. 기분전환이 필요할 때 이렇게 넓은 공원을 걷다 보면 마음이 풀리곤 했다.
오늘은 생각해 보니 아침부터 기분이 안 좋았었다. 어제 알바했을 때 다른 알바생 한 분의 불성실함을 알게 됨으로 인해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너무나 실망감이 컸었다. 그래서 왜 그랬는지 그분의 입장에서 계속 생각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계속 생각에 빠져 배부름을 일찍 느끼지 못하고 과식을 하게 된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나와서 걷다 보니 가벼운 발걸음처럼 마음도 가뿐해지고, 나에게 온전히 집중하게 되면서 상쾌함이 밀려왔다.
그나저나, 오늘은 하늘이 참 푸르고 맑으며 공기는 차디찬 날이지만 햇살은 따사롭다. 원래는 이어폰을 끼고 산책을 하는 걸 좋아하는데 갑자기 너무 밖으로 나가고 싶어서 이어폰 들고 나오는 것을 잊어버렸다. 새들이 짹짹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풀나풀 날아가는 모습을 보는데 너무나 새들이 귀여웠다. 자세히 보니 엄청나게 귀여운 뱁새무리들이었다. 아마 이어폰을 끼고 나왔으면 뱁새를 발견할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정말로 행운이었다. 뱁새를 직접 본 게 처음이라 너무 신기해서 새들이 멀어질 때까지 오래도록 관찰했다. 아직 12시 30분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공원에는 점심을 먹은 후 산책을 나온 직장인들이 몇몇 보인다. 날씨 좋은 봄날이나 가을철 점심시간에 공원은 날씨를 즐기러 산책을 나온 직장인들로 북적인다. 그런데 오늘은 영하 13도의 강추위라서 그런지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아서 오히려 좋았다. 추위를 워낙 많이 타는 체질이라 찬바람이 불 때는 움찔했지만, 그래도 얼굴에 시리게 닿는 찬바람도 오늘따라 유독 상쾌했다. 꿀꿀한 이 기분을 저 기운찬 바람에 날려 보내고 싶었다.
생각해 보니 원래 나는 걷는 것을 참 좋아했다. 걸을수록 걸음에 탄력이 붙는데 가벼워지는 두 다리의 그 느낌이 너무나 좋다. 그래서 걸어서 30분 이내의 거리는 비가 오든 눈이 오든 항상 걸어 다녔다. 그래서 필요 차 멀리 걸어가야 하는 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심부름 다녀오는 것도 좋아했고, 엄마아빠가 어디 가자고 하면 꼭 따라나섰던 나였다. 원래 점심시간에 산책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회사 동료들과 걷지 않고 혼자만의 산책을 오랜만에 즐겨보니 너무나 행복했다. 기분이 꿀꿀할 때가 아니더라도, 걸을 때 행복을 느끼는 순간을 잘 알기에 점심시간에 시간이 날 때마다 나와서 좀 더 많이 걸어보자고 다짐하는 나였다. 그리고 이렇게 땅을 딛고 걸을 수 있는 튼튼한 내 두 다리에게 매우 고마운 짧고도 짧은 산책시간이었다. 비록 점심시간이 임박하여 30분도 채 걷지 못했지만 이어폰으로 들려오는 노랫소리도 없는, 같이 얘기하며 걸었던 회사동료도 없는, 온전한 나만의 감각을 모두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땅을 디디는 두 발걸음과 자연의 소리와 따스한 햇볕으로 밝게 물드는 풍경까지 모두 담을 수 있는 세상에 참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꿀꿀했던 기분은 금방 환한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걸을 수 있다는 게 행복하고 감사하다. 산책이 이렇게 좋은 거였는데 요즘은 아침 출근길이나, 저녁에 깜깜할 때 운동 갈 때가 아니면 이렇게 온전히 햇볕을 쬐며 걸을 수 있는 날이 생각해 보니 주말을 제외하곤 거의 없었다. 추운 날이라고 점심시간에 사무실 안에만 있지 말고 이제부터라도 나에게 짧은 시간이라도 산책을 즐기며 예쁜 풍경들을 선물해 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