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벌렁벌렁 거린다.
2005년 3월이다. 북한 감옥에서 나와 중국으로 온 지 4 달이 지나갔다. 두 번째 북한 탈출인 것이다.
여전히 나는 건강이 회복되지 않았고 중국에 홀로 남겨두었던 아들도 만났지만 여전히 불안하고 아프다.
아들을 중국에 두고 가면 북한처럼 굶주리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를 처음 만난 순간 나는 꽃제비를 보는 줄 알았다. 중국에 있는 가족들이( 감히 그들을 가족이라고 이야기해야 될지는 모르지만) 엄마가 없는 아이를 전혀 돌보지 않았다.
심지어 아빠라는 사람은 누이들이 아이가 엄마 돌아올 동안 잘 크도록 돌봐주라고 돈도 주고 간 것 같은데 그 돈을 가지고 도박장으로 튀었다. 그리고 누이들이 주고 간 한국 라면은 삼촌이라는 사람이 다 먹어버리고 아이에겐 차려지는 것이 없었다.
아이 말을 믿고 어찌 그런 생각을 하냐고 할 수도 있지만 북한여성들이 중국에서 팔려가는 집들은 좋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농촌 같은 산골마을에 사는 어려운 사람들, 장애인들, 술주정뱅이, 도박쟁이들 등등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북한여성들은 성노리개 그리고 잡부 일뿐 가족도 아니기에 거기에서 태어난 아이들 조차 인간대접을 못 받는 아이들이 많다.
나에게 아들은 가족들을 다 잃고 갈 길 이 보이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었던 그 순간에 나를 살리려고 찾아와 준 희망의 등불 같은 아이이다.
그 아이로 인해 북한의 노동단련대에서 죽음의 사지까지 같다가 살아온 나 이기에 그 아이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 모두를 지금도 용서 못한다.
나무를 줍고, 탈곡을 하다가 땅에 떨어진 콩과 쌀을 주어야만 밥을 준다고 하니 고사리 같은 손으로 그것을 줍다 보니 아이의 손등이 모두 트고 갈라져 피가 흐르고,, 엄마가 없던 그 마을엔 다른 탈북여성들 아이들도 있었는데 그 아이들이 모여서 산에 가서 놀고 점심엔 교회 찾아가서 밥을 먹었다고 한다.
그런 아이를 처음 내 품에 안으니 분노보다는 일단 행복이 한가득했다.
세계를 내 품에 안은 것 같았다.
그런 아들이 밥을 먹고 나면 그대로 화장실로 뛰어가 설사를 하고 밥을 무작정 많이만 먹으려고 하는 것을 보면서 아이가 영양실조가 온 것을 알게 되었다. 영양실조로 수없이 죽어가는 아이들을 보았기에 아이의 식사를 조절하면서 나와 아이 모두 일단 건강회복에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만 중국땅을 뜰 수 있기에,, 내가 만약 다시 잡힌다면 나는 물론이고 아들도 도 살아남지 못하며, 나의 마지막 가족은 내가 살려야 한다는 욕망이 내 마음에서 불끈불끈 솟아오른다.
그렇게 나는 둘 모두 건강 회복 하면서 한국으로 갈 통로를 찾아야 하는데 아들과 나 둘 만 따로 지낼 수 없었다.
이미 내가 북한에서 돌아온 것을 알기에 중국 남자 쪽은 언제든지 나를 다시 찾아낼 수 있고 공안에 고발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악마의 굴에 다시 들어가기로 생각했다. 한 마디로 적과의 동침을 다시 시작하려고 했고 그래야만 건강 회복도 할 수 있는 조금의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일단 중국 쪽은 내가 다시 돌아오니 조금 신나 보였다. 북송되었을 때는 본인들이 인신매매에 투자한 투자금이 아까워 나의 아들을 천시했던 것인데 일단 돌아와서 제 발로 찾아왔으니 안심하는 것 같았다.
나도 내 아들을 살리려면 가면을 쓴 천사가 되어야 하며 또 악마가 되어야 한다.
중국 쪽 사람들은 발뒤축만 봐도 돼지주둥이 보는 것 같이 역겹고 토할 것 같고 하루에도 수천번씩 그 소굴에서 뛰쳐나가고 싶지만, 아들을 위해서 잠시 참아야 한다.
내 마음에서 올라오는 분노를 잠시나마 내려놓고 생각할 여유를 가져야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전화통화도 할 수 있고 잠시나마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드디어 브로커를 찾았고 브로커와 이미 약속을 한 다음 길을 떠나는데 중국 남자에게는 브로커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엄마와 아들이 약속 장소에 무사히 도착하면 돈을 지불한다
그런데 이 말 조차가 이상하다라고 그는 생각도 안 하고 돈을 준다는 이야기에 , 악마같은 인간은 쭈그러져 당장 바닥에 떨어져 나 갈 썩은 호박이 뎅굴 뎅굴 춤을 추고 있는 것 처럼 입가가 실룩 실룩 이래우로 오르내리고 있다. 그 추악한 모습을 봐야 하는 나는 헛구역질이 계속 올라온다.
한국으로 가면 우리가 돈을 내야 하는데 왜 브로커가 돈을,,, 브로커는 내 친인척들이 한국에 있는데 그들이 나를 찾았다고 이야기하니 믿는 눈치인 것 같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중국의 산골 마을들은 식량은 넘쳐나지만 사람들 인식은 여전히 깡통이었다.
중국글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잘 먹고 잘 사는 즉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라는 표현을 쓰듯이 그들은 북한여성들 앞에서 허세를 부리는 돼지일 뿐, 그 무엇도 아니었기에 돈을 준다면 자식도 파는 철면피들이다.
그렇게 나와 아들은 흑룡강성에서 도문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마을을 떠날 때 옆집에 살던 할머니에게 인사 갔다.
아들이 태어날 때 모두가 외면하고 출산을 도와주지 않았던 마을 사람들 중에 딱 한 사람, 바로 이 할머니가 나를 찾아와 출산을 도와줘 아들을 무사히 낳게 되었던 것이다.
할머니에게 먼 길을 떠날 것 같다고 만수무강하시라고 인사를 드리고 왔는데 좀 있다가 할머니는 짐에서 키우는 닭이 낳은 알 이리며 20알 정도 삶아오셨다.
먼 길 가려면 닭알처럼 굴러가야 한다며,, 내가 한국으로 가겠다고 이야기한 것 도 아닌데 아마도 내 속마음을 눈치채신 것 같았다. 미신 같겠지만, 먼 길 떠나는 많은 탈북자들이 달걀을 삶아서 배낭에 넣는다. 정말 달걀처럼 굴러서 무사히 목적지에 도달하기를 바라는 마음 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따끈한 닭알을 챙겨 들고 나는 그날밤 그 지긋지긋한 암흑의 소굴을 빠져나와 도문으로 왔고 브로커를 만나 집합소에 갔다.
브로커가 안내한 집으로 가니, 가족들로 보이는 사람들, 싱글인 사람들이 있었는데 언제 갈지 아직 모르니 그 집에 대기하라고 한다.
우선, 길을 떠나려면 나와 아들에겐 신발이 필요했다. 변변한 신발을 제대로 신으면서 살지 않았기에 그 길을 떠날 땐 나와 아들이 꼭 새 신발을 신고 싶었다.
그래서 브로커에게 이야기하니 한 아저씨를 불러 함께 시장에 좀 다녀와 주면 좋겠다고 한다.
그 아저씨는 연변에 오래 살다 보니 연변 지역을 잘 알고 있었다.
처음 본 그 아저씨인상은 키가 작지만 다부지게 생긴 든든한 남자였다.
옆에 있던 가족들이 저 아저씨 요리도 잘해서 자기들은 지금까지 저 아저씨 덕분에 잘 먹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 에겐 남자는 다 같은 그런 사람으로 보일뿐 더 이상 남자에 대한 미련을 저 버린 상태이기에 그들이 이야기하는 남자에 대한 다정한 말이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다만 그 아저씨 따라 시장에 가면 되는 것이고 거기서 나와 아들의 신발만 사면 되기 때문이다.
연변시장에 가니 중국 와서 처음으로 본 별천지 같은 곳이다. 흑룡강성에는 그런 곳이 없기에 더더욱 그랬다.
신발을 사려고 매장에 가려고 하는데 그 아저씨가 먼 길 가려면 싸구려 신발 사면 안된다고 하면서 백화점으로 나를 데리고 간다.
그리고 나와 아들의 발 사이즈를 확인하고 또 신발의 편안함과 먼 길 걸을 때 물집이 생기지 않을지 등등 꼼꼼하게 챙기는 것을 보면서 내 눈을 의심했다.
나에게는 다정함을 자랑하는 남자는 단 하나, 바로 우리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사다 주는 선물, 특히 둘째로 태어나 언니가 입은 옷을 물려받는 둘째를 항상 끔찍이 사랑했던 울 아버지, 출장길에 내 옷을 사가지고 가슴에 넣고 오셨던 그 순간은 나에게 세상 전부였는데 바로 눈앞에 있는 이 아저씨가 우리 아버지를 모방하듯 내 앞에서 바로 아버지의 다정함을 다시 되새겨준다.
신발을 신겨보고 앞을 꾹꾹 눌러주고, 뒤축이 아프지 않은지 챙겨주고 아들에게도 남자이기에 멋진 신발 신어야 한다며 웃어주는 모습에 아들은 신기해하기만 한다.
아빠가 있어도 단 한 번도 아들에게 웃어준 적 없고 도박 놀다가 아들이 방해된다고 멱살 잡아 밖에 내핑개치고, 장마당에서 돈 벌어 처음으로 아들에게 새해 선물 사줬지만 술 먹고 모두 망가뜨린 혐오스러운 사람만 있었는데 처음으로 남자에게서 다정함을 느낀 건 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그 아저씨 얼굴을 다시 보았고 그 아저씨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내 가슴은 벌렁벌렁 거린다.
가슴의 높뛰기가 확실히 다르다. 불안함에 맨날 떨면서 가슴이 두근거리던 그 가슴과는 확실히 다른 것 같은데 나는 그 당시 벌렁벌렁 뛰는 가슴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