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4일
토요다 테츠야의 만화 중에서, 아직 한국에 번역되어 소개된 적이 없는 단편집 <고글>이 있다. <고글>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우선 토요다 테츠야에 관한 설명을 하는 것이 독자를 위해서도 적절할 것 같다. 그는 1967년에 태어나서 어린 시절부터 만화를 즐겨 읽었다고 한다. 1989년에 “들개가 없는 동네에서 살고 싶지 않아”라는 작품으로 작은 상을 받지만, 데뷔에 실패하고 만다. 그는 특별한 직업 없이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만화를 계속해서 그린다. 그러다가 2003년 “고글”이라는 작품으로 애프터눈 사계상 대상을 수상하고 37세의 나이로 데뷔를 이루게 된다.
2004년 10월부터 1년간에 걸쳐 <언더커런트>라는 희대의 걸작을 연재하고(한국어 번역이 나와 있다), 연재가 끝난 뒤에 “공장에서 일하러 간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그렇지만 만화의 세계를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고 이후에도 몇 개의 단편을 부정기적으로 기고한다. 단편집 <고글>은 커피를 주제로 한 만화 <커피시간> 이후에 나온 것으로, 신오쿠보에 한국 요리를 먹으러 가는 “돈카츠”라는 이야기부터 해서 상을 받은 “고글(ゴーグル)”, 그리고 “바다를 보러 간다”는 이야기까지 총 6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커피시간>에서 그가 커피를 주제로 전작 <언더커런트>에도 등장한 적이 있는 사설탐정 야마자키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서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간접적으로 그리고 있다면, 단편집 <고글>에서는 특별한 주제 없이 보편적인 인간의 아픔과 이해를 중심으로 좀 더 힘이 들어간 만화를 보여준다.
토요다 테츠야가 <고글>에서 그리고 싶었던 테마가 무엇인지는 불명확하다. 굳이 테마를 설명하자면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아픔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언더커런트>에서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보여주었던 영화적 연출과 마찬가지로—여기서 말하는 영화적 연출은 일본 영화에서 특징적인 정적이고 암시적인 화면 구성과 연출을 말한다—그는 사람들의 내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간접 화법을 구사한다. 일본 영화의 연출을 모방한 정적인 연출이 만화를 읽은 뒤의 감동을 배가시킨다. 단편집의 마지막 단편 만화 “바다를 보러 간다”에서 그는 부모에게 학대를 당하는 소녀와 소녀를 방학 동안에 맡아서 키우는 할아버지의 짧은 스토리를 그리고 있다. 늙은 노인은 소녀가 학대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구체적인 학대 사실을 캐묻는 대신에 바다를 보러 가기를 선택한다. 자신의 스쿠터에 무표정하고 무감각한 소녀를 태우고 노인은 바닷가를 따라서 나 있는 도로를 달린다. 노인은 소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늘상 오토바이를 타고 있으면! 계절이 미묘하게 변하는 걸 알 수 있단다!”
감정을 상실한 소녀에게 노인은 무엇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일까. 지금 겪고 있는 상황도 언젠가는 변한다는 것? 그게 아니라면 바다를 보러 가는 동안 보이는 풍경이 아름다우니 삶에는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것? 아픔을 가진 소녀에게 노인의 말은 정확하게 박혀 들어와서 둘 사이에 ‘공감’이라고 할 것을 형성했을까.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고, 둘 다 아닐 수도 있을 거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바다를 보러 간다”를 이해할 만큼 풍부한 경험을 쌓지 못했다. 성숙하지 않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6년 전의 어느 겨울날에 아마존에서 주문한 <고글>을 읽고 나서 내 인생이 크게 바뀐 것 같다는 느낌을 언제나 받는다. 이미 만화를 읽어버린 이상에야, 만화를 읽기 전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술작품의 경험은 비가역적이다. 토요다 테츠야의 만화는 모두 말할 수 없는 고귀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을 감정(感情)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만.
만화가는 보편적인 인간이 이야기를, 주제를, 설명을 필요로 한다는 어떤 요구에 응답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훌륭한 만화가는 독자에게 좋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고, 그걸 받아들이는 건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나는 <언더커런트>에서 마지막에 탐정 야마자키가 던진 질문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뇌리에 깊숙이 박혀서 들어와, 지금도 나의 마음 한켠에서 대화를 불러일으킨다.
탐정 야마자키는 의뢰인의 대답에 다시 질문으로 대답한다.
“사모님. 인간을 안다는 건 대체 뭔가요?”
아내는 남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친구들끼리는 서로 오해를 거듭할 뿐이고, 할아버지는 소녀를 구해낼 수 없고 백수 청년은 소녀의 아픔을 짐작할 수 없어서 슬프다. 다만 우리에게는 희망이 남아 있을 테니까 그 모든 불통과 오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소통을 계속하면서 서로를 이해하려는 가련한 몸짓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게 토요다 테츠야가 <고글>에서 말하고 싶었던 메시지라면, 메시지 중의 일부라면, 이제 소설가로서 나는 더듬거리면서 말을 이어 나가고 그렇게 조금씩이나마 대답할 준비가 돼 있는 것이다. 예술가와 철학자들이 던진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나는 글을 쓴다. 내가 보내는 글은 모두를 위한 글이기도 하지만, 오직 나를 위해서 쓰는 글이기도 하다.** 독자 여러분께서 그 점을 너무 안타깝게 생각하지는 말기를 바란다.
각주
니체가 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부제목은 ‘모든 사람을 위한 책이자, 동시에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