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이야기를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할 마땅한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는다. 소설과 에세이를 쓸 때는 비매개적이고 직접적인 영감을 통해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소설을 쓰지 않은지는 오래 되었지만, 요즈음 소설을 다시 쓰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일기를 쓸 때 언제나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일기라는 작업을 통해서, 나는 자기 자신의 일부를 탈은폐하면서 동시에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를 은폐시킨다. 탈은폐할 대상을 고르는 것은 의도적인 작업에 속하지만, 망각 상태에 있던 무언가를 탈은폐시키는 일은 덜 의도적이다.
조금 더 엄밀하게 말하면 나는 일기라는 작업으로 보편적이고 타당한 진리를,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영원불멸하는 형이상학적 진리를 보여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이를 통해(문자 그대로 일기를 통과함으로써,) 우리는 맥락 속에서 타당한 고유한 진리를 획득한다. 에크리튀르의 흔적이 우리에게 시간에 의존하는 진리가 있는 곳을 가리킨다. 내가 탈은폐하면서 동시에 일부가 아닌 나머지를 은폐시킨다고 말했을 때 의미한 바란, 맥락 속에서 "둘도 없는" 진리를 얻는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원형 군과 대화를 나누다가, 그가 스폰지밥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노래 중에서 "월요일 좋아"라는 노래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스폰지밥과 징징이 등이 나오는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동시에 세 가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먼저, 월요일이 좋다고 말하면서 "월요일 좋아 최고로 좋아 난 일할 때 제일 멋지지 오늘부터 열심히 할 거야"라고 외치는 스폰지밥이 무척 재밌다고 생각했다. 대다수의 한국 직장인들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돈을 벌지 않으면 물리적으로 죽어야 한다ー혹자가 돈을 벌지 않으면 상황이 힘들어진다는 완곡어법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너는 죽어야 한다는 말이다ー는 결말을 피하기 위해서, 오직 비극을 피하기 위해서만 직장에 나가기 때문에, 그것과 스폰지밥의 태도 사이의 대비는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영상 중간에 (아마도 대다수의 한국 직장인을 대변하는 사람인) 징징이가 스폰지밥을 보고 외친다.
"제발 좀 조용히 해! 월요일이 좋아서 난리 떠는 멍청이는 이 세상에 너뿐일 거야!"
그러자 뚱이가 나와서 월요일이 좋다고 외친다. 징징이는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얼굴을 감싸 쥔다.
월요일이 좋다거나 싫다고 하는 건 개인의 감상일 수 있다. 개신교 교회 담임목사와 부목사들은 월요일을 좋아할 수도 있다. 그들은 일요일에 열심히 일하고 월요일에 휴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쉰다/쉬지 않는다라는 기준으로 월요일을 평가하는 일에 관심이 없다. 철학적으로 그런 기준은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그것보다, 내가 "월요일 좋아"라는 노래를 여러 차례 듣고 나서 떠올린 것은 아베 토모미가 그린 『월요일의 친구』와 아마자라시의 노래 "월요일"이었다.
"아베 토모미"라는 작가가 누구인지에 대해선 본 블로그에서 열 번 이상 언급한 적이 있으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아베 토모미의 『월요일의 친구』는 학원 만화, 소년 만화, 성장 만화로 분류가 되지만, 개인적으로 이 만화를 변증법적인 만화라고 평가해 보고 싶다. 그렇다면 변증법적인 만화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변증법적인 만화는, 주인공(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해 나가는 과정이 즉자 - 대자 - 즉자대자라는 세 단계를 충실하게 따라가면서 동시에 마지막 단계에서는 지양을 통해 높은 단계로 이르는 만화를 의미한다.
이렇게 서술하면 난해할 수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원피스>와 <체인소 맨>도 변증법적인 만화라고 말해볼 수 있다. 비록 이 둘에서는 만화 속에서 비교적 조잡한 변증법이 진행되기는 하지만. 월요일의 친구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두 명이다. 미즈타니 아카네, 츠키노 토오루. 미즈타니는 여성이고 츠키노는 남성이다. 미즈타니는 가족 내부에서 무엇을 하든 뛰어난 언니의 존재 때문에 열등감을 갖고 있는 존재로 묘사된다. 언니는 타 지역의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따로 살고 있다. 언니가 매주 월요일마다 집으로 와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을 미즈타니는 못마땅하게 여긴다. 그래서 미즈타니는 "나는 월요일이 싫어"라고 말한다.
츠키노 토오루를 만난 후로 매주 월요일마다 학교에서 모여서 "기적 사건(만화와는 전혀 무관하게 나는 존재사건(ereignis)라고 부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을 다시 한번 일으키기 위한 놀이를 하는 동안에, 미즈타니의 마음은 "매주 월요일이 기대된다"로 변한다. 변증법적인 용어로 바꿔서 말하면, 미즈타니는 츠키노라는 이름의 대자적인 존재를 맞아 "월요일이 싫다"라고 하는 최초의 앎을 지양하고 한 차원 높은 단계에서 월요일을 긍정하게 된다. 그러다 츠키노와 미즈타니 사이에 균열이 발생하고, 미즈타니는 "월요일이 기대된다"라고 하는 마음에 혼란을 느낀다. 월요일 아침을 맞이할 때마다 신성한 만남을 기대했던 미즈타니이지만, 한 사건을 계기로 해서, 밤의 만남을 긍정할 수가 없게 된다. 이윽고 마지막 결말에 가서는, 둘은 "기적 사건"을 일으키고 나서 하늘로 날아오른다. 마치 양탄자처럼 날아오르는 책상 위에 올라탄 채로 둘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진심을 확인한다. (그 이상의 묘사는 없다)
마지막 단계에서 미즈타니는 월요일을 좋아할까, 싫어할까?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이런 질문에는 큰 의미가 없다는 걸 알아챌 것이다. 미즈타니는 즉자와 대자 단계에서 경험했던 두 계기, "월요일이 싫다"와 "월요일이 기대된다"라는 계기 모두 진리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필요했지만, 그것 자체로는 진리라는 요건을 충족하지 못함을 깨닫게 된다. 즉, 우리의 일상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월요일이 좋다는 말과 싫다는 말 모두는 그녀가 "월요일"이라는 반복되는 경험에서 얻는 진정한 앎과는 무관하다. 정반합의 마지막 단계에서 츠키노와 미즈타니는 월요일을 높은 위치에서 긍정할 힘을 얻는다. 만약 "기적 사건(또는 존재사건)"이 운동장에서 벌어지지 않았다면, 월요일에 대한 고차원적인 긍정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기적은 발생했으니 이제 완성만이 남아 있다. 만화는 일 년 뒤, 동일한 사건의 반복처럼 신입생이 들어와서 북적거리는 중학교를 보여주면서 끝나버린다.
스폰지밥의 단계에서 월요일은 무조건적으로 좋은 날이다. 월요일은 당위적으로 좋으며, 스스로의 의식을 부정할 가능성은 출현하지 않는다. 『월요일의 친구』는 그것보다 두 차원 높은 단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내 생각에 이것과 비슷한 경지는 운문 선사의 "일일시호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운문 선사는 제자들을 불러 놓고 나서, 보름 전까지 어떻게 보냈냐고 물어본다. 제자들은 우물쭈물하면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다. 그러자, 운문 선사가 재빠르게 화두를 던진다.
“그대들에게 지나간 15일 전의 일에 대해서는 묻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15일 이후의 일에 대해서 한 마디씩 해 보라.” 그리고는 대중들의 대답은 들어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다.”
출처 : 불교언론 법보신문(https://www.beopbo.com)
하루하루가 좋은 날이다. 키키 키린의 유작이라는 것으로 유명한 영화 <일일시호일>에서는 "하루하루가 좋은 날"이라는 말을 인생에 대한 교훈으로서 제시하고 있다. 인간의 삶은 희로애락을 경험하는 동안 좋은 날과 나쁜 날이 있다고 믿게 되지만 (그렇게 믿지 않을 수 있을까?) 높은 차원에서 그 삶을 바라보면 좋은 날이나 나쁜 날은 완전히 동일하다. 선사들은, "일일시호일"이 하루하루가 좋은 날이 아니라 번뇌와 망상을 버린 여여한 날이라고 설명한다. 화두를 듣자마자 단번에 깨달으면 좋겠지만, 인간은 쓴맛 단맛을 다 보고 나서야 깨닫는다. 만화의 내용으로는 미즈타니는 이미 "월요일이 좋다"와 "월요일이 싫다" 사이의 이분법에서부터 벗어났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즉자대자의 형상을 이루었으니까. 그러나 『월요일의 친구』 마지막 화는 우리에게 묻지 않으면서 묻는다. 질문하지 않으면서 질문한다. 아마 나라면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인과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한다면, 인과에 얽매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좋고 싫음을 완전히 극복했다고 생각한다면, 그 순간에는 좋고 싫음에 매여 있다고 할 수밖에요."
https://youtu.be/fodRoRdDSug?si=1vSsZMzV82P5yF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