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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재 Nov 07. 2024

클리어런스 세일 (2)

사소설 시리즈 #1

https://youtu.be/z4ye2hbKcyk

Santa claus is coming to town(Live), 키스 자렛 트리오의 연주


Y가 석사논문을 완성하고 국문학과 박사과정에 무사히 들어갔다는 기쁜 소식이 전해지자, 나는 이번에는 대학로 근처에서 보자는 제안을 했고 Y는 초대에 응해주었다. 우리는 대학로에서 보기로 하고 점심을 먹을 수 있는 장소를 물색했는데, 마땅한 후보가 떠오르지 않아서 고민을 거듭한 결과 내가 예전에 이 년 동안 살았던 적이 있는 성북동에서 만나 카레를 먹기로 했다. 카레 전문점은 간판 없이 성북동에서 영업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매우 유명한 맛집이 되었지만, 내가 그곳에서 살 때만 하더라도 유명한 곳이 아니었다. 나는 2019년 말부터 2020년 초까지 간판 없는 카레 가게를 방문해서, 고수가 올라가 있는 돼지고기 카레와 시금치가 들어간 시금치 카레, 버터 카레를 먹었다. 그것이—카레와 밥을 뜬 한 스푼이—내 입 속으로 들어와서 미각을 일깨우고 새로운 맛과 향을 전달할 때, 이루 말하기 어려운 순수한 즐거움을 느꼈다. 게다가 카레는 리필도 가능해서 밥이나, 혹은 소스가 부족하면 주인에게 요청해서 밥과 소스를 추가해서 먹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2020년 4월 이후로 나는 성북동을 떠나서 인천에 있는 본가에 가서 살게 되었고, 덕분에 그 카레 가게를 찾아가는 일도 없어졌다. 이후로 대학교를 방문하러 성북동 근처에 간 일이 몇 번 있었지만, 나는 카레를 먹으러 일부러 그곳을 찾아가지 않았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카레 가게는 한성대입구 역에서도 걸어서 이십 분 정도 떨어진 골목길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역에서 내린 뒤에도 많이, 많이 걸어야만 했다. 둘째로, 공교롭게도 내가 성북동에서 떠난 다음에 인스타그램에서 카레 가게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웨이팅이 생겼다. 기본 20분에서 30분을 기다려야 카레를 먹을 수 있었는데, 이것은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내 입장에서 큰 부담이었다. 마지막으로 영업을 하지 않는 날에는 애초에 가 봤자 헛수고였다. 그래서 나는 Y와 한성대입구 역에서 만나자고 하자마자 ‘카레’라는 단출한 이름의 가게가 영업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네이버 검색으로 알아보았다.

검색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카레”는 일주일에 두 번 정기 휴일을 가졌고 점심과 저녁에는 늘 웨이팅이 있지만 그런 점을 제외하면 특별히 문제랄 것은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만나기로 먼저 약속한 날에는, 이것이 가장 핵심적인 정보인데, 가게를 열었다. 비록 웨이팅을 견뎌야 했지만, 그런 사소한 사항을 무시할 정도로 카레가 먹고 싶었다. 나는 Y에게 카레를 먹자고 말하고서 당일에 만나기로 했다.

당일 점심, 예정보다 일찍 도착한 나는 지하철역 주변에 있는 병원에서 신속항원검사를 받기 위해서 이비인후과와 내과를 검색했다. 당시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Covid 19)가 맹위를 떨치고 있었으므로, 목이 아프거나 기침이 난다거나 코가 막힌다 싶으면 바로바로 검사를 받았다. (만약 검사를 받는 가격이 오천 원이 아니라 오만 원이었다면 절대로 검사를 받지 않았을 거다.) 다행히 토요일 오후에도 문을 여는 병원이 있어서 나는 지도 검색으로 그 병원을 찾아서 갔다.

그러나 슬프게도, 오후 1시부터 2시까지는 점심시간이라서 접수를 받지 않는다고 그랬다. 할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려서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2시가 될 때까지 시간을 때웠다. 마실 필요가 없는 음료수를 빨대로 마시면서 시간을 때우는 것도 고통스럽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지루하고 무의미했다. 2시가 되기 10분 전에 카페를 나와서, 병원으로 들어갔더니 이미 한 명의 환자가 진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나처럼 1시에서 2시 사이에 이 병원을 찾아온 사람일 것이다. 나도 예약하는 종이에 수기로 이름과 생년월일을 적고 나서, 편안해 보이는 소파에 털썩 걸터앉았다. 들고 온 가방이 후줄근한 낡은 에코백인 것이 조금 신경 쓰였지만, 별 수 없었다.

병원—분명히 이비인후과인 것으로 기억하는데—의 유일한 의사는 매우 친절할 뿐만 아니라 손동작이 다람쥐처럼 재빨랐다. 게다가 동작은 효율적이기까지 했다. 그는 내가 병원을 찾은 목적을 물어본 뒤, 바로 신속항원검사 키트를 상자에서 꺼내서 만년필만큼이나 긴 면봉을 나의 코 안쪽으로 집어넣고, 목젖이 있는 곳까지 집어넣었다. 이미 여러 번 PCR 검사를 경험하였기 때문에 아픔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러나 면봉이 목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왜 굳이 길다란 막대기를 목과 코 안으로 무식하게 집어넣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병원의 간호사로부터 <신속항원검사 결과: 음성>이라고 적힌 종이를 받아들고서, 때마침 역에 도착한 Y를 만나서 마을버스를 타고 웨이팅으로 악명이 높은 그곳으로 향했다.

우리는 두 번째 만남이 서로가 예상한 것보다 빠른 시기에 이뤄진 것을 놀라워했고, 또한 Y가 무사히 석사학위 청구논문을 쓰고 석사학위를 받은 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축하하는 마음이었다. 자기 자신의 학위를 축하한다는 건 남들의 시선에서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가 이 년 만에 과정을 수료한 것을 생각하면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성북동의 유명한 “카레”는 예상대로 여러 고객이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봄 날씨에 걸맞게 두텁지도 얇지도 않게 차려입은 사람들은 모두 제각기 개성적이었고, 남자 두 명이 온 경우는 우리들 뿐이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대한민국에서 카레를 먹기 위해 일부러 찾아오는 남자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거나, 아니면 2020년의 어느 시점에서 사라져 버린 듯하다. 왜 남자들이 카레를 먹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파악할 길이 없다. 아무튼간에 우리는 대략 10분을 기다렸다. 가게 바로 앞에 갈대가 꽂혀 있는 화분이 하나 있어, Y가 갈대를 어루만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무심결에 “Y님이 갈대를 만지고 있으니까 정말로 시인처럼 보입니다”라고 속마음을 말했다. 그 말에 순간적으로 대답을 잃고 그는 웃었는데, 지금도 멋쩍은 웃음이 삽화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다.

가게에 입장하고 우리는 같은 카레를 주문했다. 카레를 먹으며 맥주를 마시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카레” 가게는 주류를 취급하지 않았다. 우리는 얌전하게 카레를 먹었고, 먹는 중간에 여러 가지 화제를 두고 대화를 나눴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문학 이야기였다.

성북동에서 카레를 먹은 뒤에 우리는 바로 건너편의 버스 정류장에서 혜화역으로 가는 2112번 초록색 버스가 오기를 기다렸다. Y는 내가 저번에 편의점에서 일만 원치 즉석복권을 산 것을 보고 매우 인상 깊게 여겨서, 자신도 복권을 오천 원치 구매했다고 말했다. 그것이 오만 원에 당첨이 되어서 현금으로 바꾸고 오천 원치를 또 구매했지만, 이번에는 당첨이 안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사만 오천 원 이득을 보았고 그것에 매우 만족한다고 그랬는데, 나는 이 이야기를 기억해 두었다가 블로그에 쓰기로 결심했다. 왜 우리가 성북동이 아니라 혜화역 근처에 있는 카페를 가게 되었냐면, 그 근처에 1956년부터 영업을 시작한 유명한 다방이 있었기 때문이다. 학림다방은 알 사람들은 전부 알 만한 곳인데 나는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에 그곳을 자주 찾았다. 내가 그곳을 자주 찾은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추측을 해 보자면 나는 클래식 음악이 스피커에서 흘러 나오는 곳을 좋아하고 또 커피 이외의 음료가 맛있는 곳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학림다방은 모든 사람들이 방문하는 핫 플레이스가 되어 있지만, 내가 대학원에 막 들어간 때만 하더라도 아직까지는 여유가 있어서 기다림을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우리가 학림다방으로 올라가는 좁은 계단을 조심스럽게 걸어 올라가자 그곳에는 문 앞부터 벌써 웨이팅이 있었다. 정말이지 인스타그램과 트위터, 페이스북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매우 좁아서 성인 남성이 나란하게 서 있기 힘든 계단 위에 엉거주춤하게 서서 J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했다. J선생님에 대해서는 할 말이 사흘 밤낮을 해도 모자랄 정도로 매우 많지만 여기서는 간단하게 설명하기로 한다. 내가 존경하는 선생님은 한국문학 평론가로 활동하면서 『한국문학과 그 적들』, 『세계문학의 구조』 등의 책을 출판하고 가라타니 고진의 책들을 번역하기도 했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한국문학의 평론가보다는 가라타니 고진의 번역가로 널리 이름을 알렸다. 왜냐하면 J선생님은 주로 한국문학의 이런저런 나쁜 관습이나 병폐를 비판하는 관점에서 질책이 담겨 있는 평론을 썼는데, 그것이 문학자들의 입맛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J선생님이 쓴 글들은 일반적인 문예지에 거의 실리지 않았다. (가끔 문학잡지에 기고를 할 때도 있었지만, 다른 문학평론가들처럼 주기적으로 자신의 글을 기고한 것은 아니었다.) 반면에 ‘철학자’ 가라타니 고진의 명성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높아질 따름이었고 그에 비례해서 J선생님의 인기도 조금씩이지만, 점진적으로 높아지고 있었다.

나는 Y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있는 박사과정 분과 함께 지난 11월에 J선생님을 뵈었다. 그 당시 J선생님은 스스로 개업하신 일인 출판사에서 세이료인 류스이의 미스터리 소설 『코즈믹』을 이제 막 출간한 참이었다. 우리는 기념으로 한 권씩 책을 선물 받았다. 그리고 저녁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중요한 이야기와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가 마치 마블 치즈 케이츠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나는 그중에서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만 쏙 뽑아서 Y에게 그대로 전달했다. 이야기를 듣고 난 Y의 대답은 무척이나 간결하기 그지없었다.

“이제 J선생님은 ‘문단’의 권위가 되셨으니까요. 새롭게 문단으로 입장하는 또는 입장하려는 젊은 사람들과는 아무래도 다르죠.”

나는 그의 대답에 만족하면서도 동시에 알 수 없는 불만족을 느꼈다.


학림다방은 내부가 좁은 편이었지만 2층과 3층이 복층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천장이 매우 넓다는 것이 장점이었다. 나는 내심 3층의 테이블석으로 안내받기를 바랐고, 바람대로 아르바이트 웨이터는 우리를 3층 테이블로 안내하며 메뉴판을 돌려받았다. 이미 웨이팅으로 대기하는 동안 마실 음료를 골랐기 때문에 메뉴판을 들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여하튼 Y는 자리에 앉아서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제본한 석사 논문을 끄집어내어서 나에게 건넸다. 나는 석사논문 자체보다 나를 위해서 그것을 준 Y의 마음 씀씀이에 고마움을 느꼈다. 나는 정말 고맙다고 그에게 대답했다. 그는 웃음을 지으면서, 원래는 반양장 제본으로 논문을 여러 부 인쇄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돌리려고 했지만, 그러는 것보다 ‘석사 취득을 기념해서 양장으로 제본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스스로 내렸고 실제로 양장으로 제본하니까 마음에 든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나도 양장이 새까만 검은색이라서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그는 화제를 바꿔서 자신은 문학 씬이라는 것이 너무나 이상하게 굴러가고 있는데, 지금의 상황을 해결할 의지가 그 누구에게서도 보이지 않는다고, 이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강변했다. 나는 그의 의견에 동의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던전>의 예를 봐도 알 수 있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과 시를 쓰려는 사람들이 소수지만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근대문학의 종언 이후로, 근대문학이 끝난 뒤에도 그저 아무런 반성 없이 과거의 유산을 고장 난 테이프처럼 반복하는 데 지나지 않는 한국문학에 관심이 없었다. 시의 경우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소설은 새로운 글이 나오지 않을 뿐 아니라 적은 독자층도 새로움을 요구하지 않고, J선생님처럼 한국문학을 애정을 담아서 비판하던 사람도 슬슬 이 상황에 대한 ‘지겨움’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차피 근대문학이 한번 끝났다면 그리고 가라타니 고진이 말한 근대문학의 종언이 참이라면, 지금 K-소설이란 이름으로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이런저런 번역 행위들에서도 문학사적인 의미를 찾아내기란 어려웠다. 나는 오히려 장르 문학의 성과에 주목하는 것이 그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K-소설보다는 유의미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문학의 경우에는,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던 근대의 한 페이즈가 끝나고 나서 아직 새로운 문학적 성취가 찾아오지 않은 상황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어요. 마르크스가 그런 말을 했는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낡은 것들이 전부 물러난 자리는 폐허가 되었고 그곳에 ‘새로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인 거죠.

저는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서둘러서 찾기보다, 먼저 당면한 문제를 그 문제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포함해서,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우리의 문제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이미 한국문학의 독자들에게 도래한’ 새로운 문학을 발견하는 일은 어려운 일도 아닐뿐더러 자연스럽게 주어질 거예요. 또한,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문학 바깥에 거주한다고 생각해 왔던 평범한 사람들이, 온라인 문학 플랫폼이나 자유투고 사이트, 포스타입 등을 매개로 삼아서 자신의 고유한 이야기를 표현하려고 애쓰는 사실에도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선택받은 특정한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출판할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면 모두 출판을 할 권리를 자연법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죠.”

장황한 발언이 끝이 나자 Y는 커피 젤리가 들어간 파르페를 마저 먹더니 조심스럽게 기억의 사면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처럼 나에게 물었는데, 나는 이것이 오늘 모임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직감했다.

“그 후로도 아내가 사라지는 꿈을 꾸신 적이 있나요? 이상한 꿈을 자주 꾸는 것도, 소설가로서 글을 쓰는 것과 뭔가 관련이 있지 않으려나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의 행위에는 이중의 의미가 있었다. 첫째 의미는, 말 그대로 아내가 사라지는 꿈을 그 이후로는 꾸지 않았다는 점이고, 둘째 의미는 내가 이상한 꿈을 빈번하게 꾸게 되는 것과 작가 생활은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다는 것을 전달했다.

나는 Y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고개를 가로젓는 것으로 분명한 대답을 했다고 보았다—정신분석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프로이트와 융에 대한, 널리 알려진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지크문트 프로이트와 칼 융은 스위스에서 활동한 정신분석가들이죠. 융과 프로이트는 서로 친하게 지내면서 아버지와 아들처럼 깊은 관계를 이어 나갔지만, 미국으로 여행을 떠난 것을 계기로 서로 멀어지게 되었다고 해요.

둘이 멀어지기 전에 있었던 일인데, 프로이트와 융은 기차를 타고 멀리 떨어진 목적지로 향하던 중이었어요. 융은 프로이트의 꿈을 분석하면서 이것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말 그대로 바닥까지 드러내어 보여준다고 설명했는데, 프로이트는 도중에 말을 멈추면서 자신의 꿈을 멋대로 분석하지 말라고 융에게 고함을 질렀고, 프로이트의 ‘저항’ 때문에 분석은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한 가지 더. 두 사람은 어느 방에서 환자의 정신분석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쾅! 하는 소리가 먼 곳에서부터 들려왔다고 합니다. 그것을 듣고 나서 프로이트는 놀랐지만, 융은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큰 소리가 들릴 겁니다라고 말했고, 그리고 융의 예언대로 쾅! 하는 거친 소음이 들려왔습니다. 이것은 융이 말년에 설명한 ‘동시성’인데, 쉽게 말하면 자신의 무의식이 생각하는 내용과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비인과적인 법칙으로 알 수 없는 매개를 거쳐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죠.”

웃으면서 Y가 대답했다.

“그런 설명을 현대과학을 신봉하는 현대인이 곧이곧대로 믿기는 아마 어렵지 않을까 싶은데요.”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의 말대로 융의 동시성 개념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나의 마음과 현실세계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다면, 그건 잘해 보았자 소설적인 오컬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융의 동시성이 성립하는 대상이 내면의 믿음과 주체 바깥의 세계가 아니라, 이야기의 내용과 이야기를 읽고 쓰는 작가라면 과연 어떨까?

나는 융의 동시성 이야기를 하다가 도중에 멈추고, 이제 더는 쓰지도 않고 읽지도 않는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서 화제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고, 이것은 일부 성공을 거두었다.

“지난번에 문학 플랫폼인 브릿G에 공개한 단편 “향유의 시간, 짧은 즐거움”을 끝으로 더 이상 한국어로 소설을 쓰지 않았어요. 제가 한국어로 소설을 쓰지 않는 데는 몇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지만, 지금 생각하는 중요한 이유는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제가 무시해 왔다는 것이죠. 제가 잊어버리고 망각해 온 가장 핵심적인 진리는, 소설이 곧 그 사회의 문화를 반영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Y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할지 궁금했다. 그래서 일부러 말을 멈추고 나서, 눈동자를 반짝거리고 있는 Y가 말하기를 가만히 기다렸지만, Y의 대답은 그가 시인이자 문학 연구자라는 사실을 감안해도 지나치게 간결했다.

“소설이 그 소설이 쓰인 사회의 문화를 반영한다면, 시는 문화를 반영하지 않나요?”

나는 반사적으로 응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다지 자신 있는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한국어로 쓴 시도 문화를 반영하기는 하겠지만 아마도 시가 반영할 수 있는 문화의 범위는 ‘한국 문화’라는 좁은 반경을 넘어서, 훨씬 더 넓은 범위라고 생각합니다. 소설은 더 좁은 범위의 문화를 반영하죠. 당대를 그것 자체로 긍정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계속해서 같은 언어로 소설을 쓰기란 어려울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가 아내의 꿈을 꾸지 않고 그것과는 종류가 다른 꿈을 꾸는 것과 비현실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다시 말해서, 조잡한 비유이기는 합니다만, 아내가 한국문학이라면 저는 한국문학과 동거를 하고 있는 작가인 셈이죠. 그건—햇수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대략적으로 추산해서—2019년부터 2021년의 겨울까지였습니다. 그 사이에 저는 장편소설을 하나, 중편소설을 둘, 그 밖에 서너 편의 단편소설을 썼습니다. 2022년 초에 발표한 “향유의 시간, 짧은 즐거움”은 제가 마지막으로 쓴 단편입니다. 이건 사소설의 형식과 문법을 빌리고 있기는 하지만 완전히 허구에 가까운 소설로, 오래전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회전목마의 데드 히트』에서 허구를 기반으로 한 사소설을 쓴 것을 보고 영감을 받아서 단번에 쓴 소설이에요. 그리고 이 소설은 소수의 지인들에게 특이하다면서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어떤 지인은, 대학원을 같이 다닌 사람은, 있는 그대로를 쓴 소설도 소설이 될 수 있냐면서 굉장히 참신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만요.”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던 Y는 디저트를 다 먹고 물을 한 잔 마셨다. 물의 모임이 식도를 지나서 위장으로 넘어가는 ‘생물’의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말을 이어갔다. 청산유수처럼 말이 쏟아져서 그것을 입으로 표현하기만 하면 되었다.

“아실지 모르실지 몰라서 다시 한번 환기를 시키자면 저는 오래전에 라캉을 읽는 공부모임을 주최한 적이 있습니다. 브루스 핑크가 쓴 유명한 입문서를 이 년에 걸쳐서 읽었어요. 그건 유익한 공부모임이었고 지금도 제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유가 있어서 저는 정신과 의사가 되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어요. 의사가 아니라 철학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시간이 쏜살같이 빠르게 지나가고 그에 발맞춰서 삶의 속도도 빨라졌습니다. 철학과 대학원에 입학을 하고 수업을 듣고 2017년부터 여러 편의 소설을 쓰면서 동시에 온라인 웹진에 시각문화에 대한 비평문도 투고했습니다. 말 그대로 최고의 생산성이 2021년 말까지 대략 사 년간 꾸준히 유지됐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내 이야기를 듣고 있음을 표현했다. 나는 앞에 놓인 녹차라떼를 마저 마시고 나서 혀로 입술의 가장자리를 훑었다. 혹시나 라떼의 거품이 입가에 묻어 있을까 봐 취한 무의식적인 행동이었지만, 혀에는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슬슬 이야기가 끝나간다는 것을 느끼고, 정리를 하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베를린 필 혹은 빈 필하모닉, 독일의 교향악단이 지휘하는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도 3악장을 지나서 점차 마지막으로 고조되고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이 남긴 말처럼, 저는 말할 수 있는 모든 말을 하기 위해서 애썼어요. 그것이 놀랄 만한 생산력과 글쓰기를 향한 집념을 강령술처럼 불러왔고, 저의 무의식은 그에 호응해서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어요. 만약 그게 아니라면 그만큼이나 많은 소설을 쓰지도 못했을 것이고 한국어 글쓰기를 그만두는 시점도 몇 년이나 일찍 찾아왔을 것이고요. 저와 함께한 이 년이라는 시간 동안, 아내는 갚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선물을 주었습니다.

미국 북서해안의 인디언 콰키우틀이라는 원시 부족의 풍습 중에서는 포틀래치(potlatch)라는 이상한 풍습이 있어서, 그 풍습을 조사한 문화인류학자에 따르면, 부족장은 다른 부족의 장에게 갚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선물을 줌으로써 자신과 ‘부족’이 상대방보다 우월하다는 그릇된 신념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관하기도 어려울 만큼 수많은 선물을 받은 상대방은 가만히 지고 있을 수만 없어서 더 많은 선물을 상대방에게 보내게 되고, 이 ‘선물의 연쇄’는 어느 한쪽이 더 이상 선물을 할 수 없을 때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니 무한히 반복되지는 않습니다. 상대편의 호의를 갚을 수 없을 경우 패배하는 겁니다. 물론 패배했다고 해서 결코 나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부족의 재산을 수호하게 되는 거니까, 자본주의적으로는 이득이죠.”

가만히 듣고 있던 그가 흥미로운 듯이 이렇게 물어보았다.

“그런데요. 만약 J님의 설명이 타당하다면, 아내가 (즉 한국문학이) 당신에게 준 선물만큼이나 당신도 한국문학에게 갚을 수 없는 선물을 줬다고 이야기해야 되지 않을까요? 포틀래치 풍습에 대한 저의 이해가 맞다면요.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아내가 갑자기 사라진 것도 당신이 쌓인 부채를 갚지 못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당신에게 받은 글이라는 ‘선물’을 갚으려고 어디론가 도망친 게 아닐까요? 물론 문학이 도망친다는 아이디어는 우습고 이상하지만 꿈 속이라면 문학이 아내로 현현한다고 해서 전혀 이상할 건 없죠. 꿈은—시와 마찬가지로—상징과 메타포의 세계이니까요.”

아내는 무엇을 내게 원해서 갑자기 살고 있던 집을 박차고 나간 걸까? 이제 와서는 갑자기 사라진 아내의 정체가 한국문학이라는 상징적인 해석을 진심으로 믿고 있지는 않지만, Y의 설명도 부분적으로는 나의 진리를 표상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대화라는 것은, 対話이자 conversation은 최소한으로 두 사람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인 활동이다. 즉, 내가 화장실에서 거울을 쳐다보면서 자신에게 말을 건다면 이건 대화라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이제 와서 말하면 늦은 깨달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면을 빌려서 말을 덧붙이면, A와 영이라는 연상의 여성들은 나와 대화를 하기 위해서 노력했고 나는 두 사람의 노력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만약 여성들을 코엑스에서 만나지 않고 온라인상에서 교류를 계속했다면, 이건 불가능한 상상이지만, A와 나는 서로를 알아가기 위해서 대화를 계속했을 것이다. 그것이 결실을 맺을지 어떨지는 예상할 수 없지만, 애초에 우리는 거의 교류를 하지 않았으므로 무리한 가정이라는 것도 참이다, 내가 이해한 A씨는 상당히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만약 대화를 통해 결실을 맺었다면 지금까지도 그녀와의 우정을 유지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연애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과도 결국 친구 관계로만 지냈을 뿐이고 연인 관계가 되지는 못했으니까.

우리는 학림다방을 나와서 4호선 혜화역으로 내려가기 위해서 짧은 거리를 걸었다. Y는 동작구 흑석동 주변에 집이 있어서 4호선을 타고 동작역까지 내려가야 했고, 나는 사당 밑으로 내려가서 2호선을 타고 강남 방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날 하늘은 잔뜩 찌푸린 하늘이었고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져 내릴 듯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이야기의 결말에 걸맞게, 서울의 넓은 하늘에 잔뜩 낀 구름은 봄비를 쏟아부었다. 그 비는 온 세상을 적시고 그것만으로는 모자라다는 듯이 이곳저곳, 그것의 손발이 닿는 모든 옥상들을 적시고, 하염없이 날아다니는 비둘기들도 흠뻑 젖게 만들었다. 나와 Y는 우산을 준비하지 못해서 그대로 봄비를 맞으면서 지하철의 입구로 달려갔다. 나는 비를 맞는다면 산성비가 머리카락을 빠지게 만들 수도 있다는 오래된 괴담을 들려주었고, 나의 농담에 그는 웃으면서 화답했다.

“아직 머리카락이 많아서 괜찮아요! 그보다는 책들이 잔뜩 들어 있는 가방이 젖는 게 걱정이 되는걸요. OO씨, OO씨는 괜찮아요?”

갑자기 이름을 불린 터라 적잖이 당황했지만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비를 맞으면서도 환하게 웃는 Y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우리에게 근심과 좌절이란 아직 먼 이야기였다.


우리는 문학플랫폼 <던전>이라는 작디작은 우연으로 서로를 알게 되었고, 벌써 두 번이나 만났다. 우리는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이것, 고유한 경험은 각자의 인생에서 잊어버릴 수 없는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그의 젊은 얼굴이 각막에 맺힌 짧은 순간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우리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지나가는 중이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간들. 결코 허투루 무의미하게 보내서는 안 되는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매우 가끔이지만, 예전에 다닌 적 있는 고등학교로 돌아가는 꿈을 꾼다. 어둡고 낡은 데다가 추레하기 그지없는, 콘크리트가 아직도 회색 빛깔인 모교에서 나는 여러 여자들을 마주친다. 한 여자는 내가 현실에서 여러 차례 본 연상의 여성이고, 나는 그녀와 아름다울 정도로 황홀하고 또한 달콤한 키스를 나눈다. 이미 나이가 서른이 넘었지만 우리들은 교복을 입고 있다. 정말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배경이 학교라서 쉽게 납득해 버린다. 다른 여자는 내가 현실에서 마주친 적이 없는 여자인데, 파자마 차림으로 그녀는 등을 돌린 채로 나무의자에 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침묵을 지키기로 결정한 것만 같다. 그녀에게 말을 걸고 싶지만 나는 이것이 꿈이라는 걸 알아채고는 마음을 단념한다. 나는 대화가 금지된 장소에서 분홍색 파자마 차림의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무력하고 어린 자신의 존재를 깨달으며, 꿈은 한순간에 암 전하고 현실의 나는 잠에서 깨어난다.

모든 소중한 기억들이 사라진 자리에서도 어떤 기억은, 색깔이 다른 기억은 사라지지 않은 채로 찬란하였던 과거를 증언한다. 그것을 기록하고 후세에 전달하기 위해서 먼 과거의 누군가가 ‘이야기’, 그리고 ‘소설’을 발명했다고 상상해 본다. 이야기란 처음에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가 알파벳과 같은 문자가 발명된 이후에는 문자로 기록된 글에서 글로 전해져, 이제는 다양한 매체로 다양한 방식으로 전달되고 있다. 그러나 수많은 이야기가 나타난 부작용으로 대다수의 이야기는 공간 속에 묻혀버리게 되었고, 오직 소수의 이야기만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그렇다면 소설이란 대체 무엇일까? 아직 질문에 걸맞은 완벽한, 백 퍼센트의 대답을 찾지 못한 입장에서, 마지막으로 기억을 서술하는 이야기를 쓰는 것으로, 광택을 내어 갈고닦을 필요가 없는 이야기, 이미 모든 과거를 말하고 매대에 올라간 이야기, 클리어런스 세일을 하고 있는 이야기를 쓰는 것으로,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으로 아내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보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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