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울 미[美] ‘미학적인’이라는 형용사적 표현을 사랑합니다. 감히 아름다운 미물에 ‘학’[學]까지 붙여가며 가만히 감상시키는 표현 아닙니까. 그러니 저는 미학적인 것들을 모조리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 취향을 다시 머금게 하는 미학적 미물들에게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햇빛에 비춰보면 자신이 발산할 수 있는 최대한의 빛을 내뿜습니다. 선하게 곱슬곱슬한 머릿결, 투명 빛을 받으면 반짝거리는 무지갯빛 손 비늘, 붉게 잘 익은 글로리 한 입술, 뻣뻣한 코트 속 힐끔 보이는 목선, 땅 위를 쓸고 다니는 방랑한 두 다리. 지금이 오기 전까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저도 조금은 미학적이란 대상을 지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 모습을 만족하며 산다는 게 저로서는 행복이며 행운입니다. 보면 볼수록 미학적이라 느낍니다. 감히 스스로를 미물이라 지칭합니다. 9시간 동안의 고통을 참아내며 탄생한 고귀한 생명이었으니 말입니다. 자기 과 의식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비웃는다 하더라도 저를 사랑하는 이 자기애는 변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누구나 미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라는 말을 좀 달리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타인으로부터 미물로 인정받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스스로부터 인정해주는 일이 우선인 겁니다. 그렇게 하나둘씩 자신의 미적인 부분을 알아 봐주는 이들이 생겨날 겁니다. 자기 자신도 바라봐주지 않는 이를 누가 바라봐주겠습니까. 이 중요한 덕[德]을 둘째 이모 덕분에 깨달았습니다. 거울을 보며 예쁘게 웃는 연습하고 잘 바르지도 않던 선크림을 바르기 시작했습니다. 잘 어울리는 색을 찾고, 건강한 음식을 먹어주고, 잘 어울리는 머리를 찾기 위해 여러 스타일을 도전해 본 것 같습니다.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에 기대하지 않았던 칭찬과 반응에 조금은 기분 좋았습니다. 사람의 상상력과 실행력은 현실로 만들어주는 힘이 있습니다. 본보기를 정해 관찰하는 일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게 저와 맞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기준마저 스스로 만들어야 온전히 후회에 책임질 수 있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어떤 일이든 주어진 선택의 길에서 자신을 믿고 자기를 위한 선택을 하는 이라면 언제든 행복할 수 있습니다. 많이 꿈꿔보시고, 작은 일부터 시작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저는 제 모습에 만족을 하고 또 다른 새로운 무언가를 원하게 됩니다.
이렇게 겉모습으로 사랑받길 원하는 저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사실 주변인들의 관심이 제 빈곤한 마음을 다 채워주진 못합니다. 시간이 지나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리게 됩니다. 부모님께 눈치보며 자란 것도 아닙니다. 외모를 가꾸며 다음으로 원하게 된 건 외적인 미[美] 이상의 가치입니다. 결론적으론 정상적인 사고, 이상적인 삶의 태도와 지덕체를 갖춘 그렇게 부러움을 사는 어른들의 뮤즈가 되고 싶었습니다. 외적인 미[美]도, 제 통장 잔고도 이보단 우선시 되진 못합니다. 내 삶을 대하는 태도, 타인을 대하는 내 모습, 자기절제가 잘 된 모습, 제대로 잘 자리잡힌 생활습관과 라이프 스타일 등 저의 사고와 행동이 조금은 탄탄한 내공있는 저를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겉 모습만 가공하느라 잘못 잡힌 소비행태와 시간만 나면 sns로 타인과 비교하고 뭐라도 하나 더 얻겠다는 이상한 행실이 삶의 균형을 망쳤습니다. 그건 그리 행복이랄게 없었습니다. 오히려 나를 더 피곤하게만 했을 뿐. 그러니 모든 겉치레가 과하면 망한다는 말에 신뢰가 갔습니다. 과유불급입니다. 그렇게 새롭게 원하게 된 건 삶을 제대로 잘 살아가는 제 모습이 된 것입니다. 어디서나 절제할 줄 알고, 건강을 우선시하고, 검소하며 작은 것에도 감사해할 줄 아는 사람 말입니다.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진짜 제 삶을 살아가는 사람 말입니다. 비로소 제가 보이고 저를 진심으로 사랑하기까지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몸소 조금씩 느끼며 사는 것 같습니다.
‘비울수록 편안해지는 것’이라는 책의 한 구절을 읽습니다. 조금은 느껴집니다. 삶에 두려움과 무거운 짐들은 모두 내 안에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밖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것들을 비워내는 일 또한 내 몫입니다. 너무나 잘 보여야겠다는 부담감도, 물욕과 소유욕이 내 과도한 욕심에 치 다른 것도 조금씩 비워내며 편안함을 찾아갑니다. 나다움을 받아들이는 편안함이 너무나 심적으로 가벼워집니다. 점차 삶의 균형을 되찾고 자연스러운 미[美]를 추구할 수 있게 됩니다. 내면에 미적인 가치 말입니다. ‘미학[美學]'도 여러 형태로 존재하나 봅니다. 상당히 뒤늦게 알아채 버렸습니다. 더 이상 분수에 맞지 않는 것들로 온몸을 휘감은 자들에게서 얻어갈 미[美]는 없습니다. 비지 사러 갔다 두부를 사오는 이들에게, 비지와 두부의 한 끗 차이를 아는 이들에게서 진정한 미학[美學]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