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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E K Nov 15. 2024

얕은 지식 배틀

경주, 역사는 계속된다. 2

파도가 잔잔하다. 종일 흐릴 거라는 일기예보와 달리 하늘의 구름이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이른 아침 바다는 언제 와도 좋다.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 서서 끝없이 펼쳐지는 수평선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 세상이 전부 내 것 같은 풍요로움이 마음속에 채워진다.


"저 멀리 바위 보이지? 아까 말했던 문무대왕의 해중왕릉이야."


바다에 만들어진 전례 없던 왕릉에 관해 오면서 아이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문무대왕릉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니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빠르게 훑어보고 지나치려는데 아들이 질문을 던졌다.


"만파식적이 무슨 뜻인지 알아?"


"그럼.. 알지~~!!"


"무슨 뜻인데?"


"피리잖아?"


"뭐? 그게 다야?"


하... 분명 방학 특강책에 있던 지문에서 많이 봤다.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떠오르지 않는다. 피리였는데... 정답만 빠르게 찾아가며 읽은 지문은 머릿속에 온전히 남아있지 않다. 심지어 조금 전 딸과 안내문을 읽으면서도 스쳐 지나간 단어였다. 대충 얼버무리자 녀석이 대답했다.


"만개의 파도를 잠재운다는 뜻이야."


오호~~!! 녀석 좀 봐라?


뜬금없는 녀석의 지식창고 문이 열렸다.


만파식적

세상의 온갖 파란(萬波)을 없애고 평안하게(息) 하는 피리


기세등등해진 녀석은 수수께끼를 계속 이어갔다.


"감은사지는 뭐야?"


"그야 절이지!"


안내판을 훑어보며 감은사를 봤었다. 신문왕이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지은 절이라고 했다. '절 사(寺)'자가 들어가니 당연히 절이 맞다.


"지금은 터만 남았어. 그래서 '지(址)'가 붙은 거야. 탑도 있다고 했는데 3층이었나? 바닷물이 절까지 이어졌다고 했는데..."


요 녀석은 어떤 아이인가? 이런 정보는 대체 어디서 찾아보는 건지.. 가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옛 가요도 스스럼없이 알고 있는 아들의 출생에 숨겨진 비밀이 있는지 합리적인 의심을 할 때도 있었다.


" 솔직하게 말해봐! 몇 년도에 태어났어?"


녀석에게 자주 하던 농담이다.



얕은 지식배틀을 뒤로하고 '석굴암'으로 향했다.


아들이 계획한 일정표대로라면 석굴암은 내일 불국사와 묶어서 함께 가야 하지만, 일기예보에 종일 비구름이 떠있어서 하늘이 예쁜 오늘 가기로 급하게 결정했다.


대릉원 쪽으로 이동하는 경로를 보니 마침 토함산을 지나가고 있어서 잠시 들리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동해의 아침바다를 실컷 눈에 담은 우린 이번엔 굽이굽이 난 산길을 타고 토함산에 있는 석굴암에 도착했다.


차가운 공기가 끝을 찔렀다. 알 수 없는 긍정의 에너지가 한껏 올라왔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이곳에 온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했다.


"바로 저기야! 버스에서 내려서 저쪽 계단으로 올라갔어!"


잔뜩 흥이 오른 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그 시절 관광버스에서 내려서 눈앞에 보이는 계단을 향해 걸어가던 내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젊고 혈기왕성했던 나의 모습이 살아났다. 


기쁜 마음에 남편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남편은 주차장에서 무슨 사진이냐며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사진을 찍어줬다. 비록 지금은 40대 아줌마의 모습이지만 마음만은 10대 소녀로 돌아간 이 순간을 기념했다.


새벽 4시 30분에 집에서 출발해서 9시에 문무대왕릉을 찍고 10시가 된 지금까지 먹은 거라고는 삶은 달걀과 과일이 전부다. 배고플 법도 하지만 앳되었던 나의 모습에 이끌려 가만히 가만히 산책길을 걸어 본다. 


아침햇살이 드리운 흙길이 반짝였다. 무성하게 자란 나뭇잎사귀들이 바람에 나부끼며 솨르르 소리 낸다. 하늘거리며 춤추는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파란 하늘이 인사한다. 산새들이 지저귀는 청아한 노랫소리까지.. 도시에서 경험하기 힘든 귀한 아침 산책이 즐겁다.


잘 다듬어진 길을 따라 한참을 걸으니 드디어! 산 중턱에 있는 석굴암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옆으로 난 좁은 계단을 따라서 사람들과 줄지어 올라갔다. 정상에 오르니 저 멀리 동해바다까지 모든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우와~~~!!"


멋진 절경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신이 나서 아이들에게 의기양양 말했다.


"저 멀리 바다까지 보이지? 여기는 꼭 날씨 좋은 날 와야 해.. 비 오는 날은 걷기도 힘들고 풍경이 안보이잖아. 엄마는 너희에게 이걸 꼭 보여주고 싶었어."


엄마가 말을 하든지 말든지 배고픔이 잔뜩 차오른 녀석들은 내 마음을 이해할 턱이 없다.


지금 서 있는 이곳에서 옛날 옛적 친구들과 기념사진을 찍은 것이 생각났다. 그리운 마음에 친구에게 카톡을 보냈다. 함께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쉬움을 남겨두고 불상을 보러 안으로 들어갔다.


석굴암은 신라 중기 불교예술의 전성기 때 만들어진 문화유산 중 최고의 작품이다. 백색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본존불상이 바라보는 시선은 동해바다를 향해있다. 바로 그곳에는 문무왕이 잠들어 있는 대왕암이 있. 아침부터 우리가 다녔던 곳이 이렇게 이어져 있다고 생각하니 지나는 길에 들렀을 뿐인 석굴암이 새롭게 느껴졌다.


불상의 자연스러운 모습 온화한 미소가 신비로워서 아들과 한참을 바라보았다. 모든 소원을 다 이루어줄 것만 같았다. 살며시 눈을 감고 가족의 건강을 염원했다. 분위기에 압도당한 녀석도 천천히 내부를 눈에 담고 있었다.


"사진으로만 보다가 실제로 와서 보니 어때?"


"아쉬워요. 으로 들어가서 좀 더 가까이서 자세하게 보고 싶은데.. 그리고 불상은 생각보다 작았어."


겉으로는 힘들고 배고프다며 투덜대도 녀석은 진심으로 이곳을 바라보았다. 불상을 보고 나와서도 주위를 꼼꼼하게 둘러봤다. 바로 점심 먹으러 가자고 아우성치던 녀석들을 설득해서 올라온 보람이 있었다.


눈이 부시게 찬란한 햇살이 높이 떠올랐다. 초록초록한 깊은 산골 너머 청량한 푸른 바다가 저 멀리 안개처럼 피어있다. 눈물 나게 아름다운 경치를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며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렸다.


때아닌 산길을 걸어서 배고픈 우린 각자 취향껏 고른 초콜릿을 나눠 먹으며 다음코스인 점심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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