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달팽이도 꿈틀한다. 캐모마일이 국화차라니까?

"교수님 안녕하세요, 이사회 참석 가능여부 확인 차 연락 드렸습니다. 일정 가능하시죠?"


"네, 메일 체크했어요. 13일이라고 했나? 난 OK! 물은 꼭 에비앙으로 어레인지 잊지 말고~"


부서가 바뀌어도 이대리는 신입 시절부터 이사회 운영지원 업무를 하고 있다.

회사 규모가 크지 않다보니 이사회가 열리면 전 부서에서 인원을 차출해 역할을 분담한다.

기관장, 정부부처 고위직, 그리고 대학교수 등 외부 전문가들도 참석하는데

이대리는 주로 교수님들을 대상으로 일정 안내와 의전을 담당하고 있다.


사실 다른 누군가가 해도 될 일이지만 이대리가 그 동안 이슈 없이 꾸준히 해왔고,

신입이 담당하기에는 부담스러울 수 있으니 앞으로도 지원해달라는 주관부서의 요청 때문이다.

이대리는 신입 때 이 업무를 도맡아서 했건만...


공기업 하는 일이 매년 똑같다 보니 회의 안건도 비슷하기만 한데

무슨 이사회를 한달에 한번씩 하는 건지 의문이 가시지를 않는다.

사실 회의에 참석해서 말 한마디 않고 거마비 명목으로 수당을 받아가는 사람들 때문에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반면, 내부 사정을 잘 모르는 외부 전문가가 온갖 지적을 하고 가서는 일폭탄이 떨어져서 실무자로서 피곤해지는 경우도 있는데 방금 통화한 교수님이 바로 후자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자칭 "생산성 강화 전문가"라며 말할 때 마다 영어를 섞어서 쓰는 교수님.

부서명을 모두 영어로 바꾸고, 직원들도 영어 이름을 써야한다는 등의 당최 이해가 되지 않는 주장을 한다.

그럴 때 마다 이대리는 공공기관에 유사한 사례가 있는지 찾아봐야 했는데, 당연히 있을리가 없지.

여기가 무슨 스타트업도 아니고.. 이 분은 도대체 왜 이러는건지, 이번 회의에서는 또 무슨 소리를 할지 매번 걱정하곤 했다.


올해가 임기 마지막이라 이제는 어느정도 적응되었지만 이대리는 생산성 전문가 교수를 처음 만났던 날이 생생하다. 여느 때처럼 생수, 종이컵, 필기구, 다과류를 각 자리마다 배치해두고 교수님들을 기다렸는데 이 분은 회의실에 들어오자마자 손가락을 튕기며 이대리에게 말했다.


- "저기~ 익스큐즈미? 미안한데 혹시 에비앙 없어요? 삼다수는 그리시해서 말이지~"

그때 마침 김팀장님이 나서서 도와주셨다.

- "아 교수님, 저희가 매월 회의용으로 똑같이 업체에서 사오고 있어서요, 잠깐 기다려주시면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이사원님, 저기 길 건너편에 편의점 가면 있을것 같은데 얼른 갔다와요! 부탁할게!"

- "사람마다 프리퍼런스가 다 있는건데 너무 편하게들 일하려고 하신다~ 이래서야 생산성이 게런티되겠어요? 공공기관이란 참.. 쯔쯔"

...

무더운 여름날 땀을 뻘뻘 흘리며 에비앙을 사러가는 길에 이대리는 생각했다.

- '그리시가 뭐지? greasy를 말하는 건가? 물이 느끼하다는건 무슨 말이지?'

- '삼다수랑 공공기관의 생산성은 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거지?'


그리고 그 교수를 볼때마다 얼굴이 따가울 정도로 강하게 내리쬐던 햇볕처럼 속에서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어찌나 욕심은 많은 지 회의가 끝나면 다른 사람들 자리에 있는 다과들도 알차게 가방에 챙겨가곤 한다. 생수는 에비앙만 찾으면서 과자는 프리퍼런스가 없는 사람인가 보구나 생각했다.

...

이사회 당일이 되었다. 점심시간 직후에 이사회가 열리는 경우에는 커피를 케이터링해서 회의장 한켠에 준비해둔다. 다행히 카페 사장님이 여유 있게 일찍 오셔서 준비해주고 갔다. 이제 사람들만 제 시간에 도착하면 된다. 제발 오늘도 무사히 끝나기를 바라며 기다리던 중 회의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야 교수님이 도착했다.


"이대리, 난 국산차 시원한 걸로 준비해줘. 요즘 잠을 잘 못 자서~ 카페인 컨트롤 해야지"

"앗, 네 교수님! 알겠습니다!"


국산차라니? 회의 시작까지 5분 밖에 암 남았는데 국산차를 어디서 구한담...부리나케 1층 카페에 가봤더니 몇가지 허브티 종류가 있었다. 로즈마리, 페퍼민트, 루이보스, 캐모마일.. 아! 캐모마일은 국화니까 괜찮겠지.


뜨거운 물에 티백만 넣어줄테니 금방 나오리라, 이대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원 때였으면 당황해서 우왕좌왕했을 텐데 이제 대리정도 되니 이런 생각도 할 수 있다는 자신이 대견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교수님, 아이스 캐모마일티입니다"

"이게 뭐야? 나 국산차 달라니까?"


순간 이대리는 머리속이 하얘졌다. 유난히 더웠던 그 여름날의 햇볕 때문인지, 오늘따라 지하철에서 발을 많이 밟혀서 그런건지, 아니면 직속 상사도 아니면서 하인 다루는듯한 교수의 태도가 불편했던 건지, 이대리는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이 튀어나왔다.


"캐모마일이 국환데요?! 국화차도 국산차인데요?!"

"저기 나랑 지금 말장난해? 애티튜드가 이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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