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달팽이가 회사에서 만난 임원 이야기

통상 공기업은 정권이 바뀌면서 새로운 기관장이 임명되면 본부장급 이상의 임원들은 자의 혹은 타의로 짐을 싸게된다.

마침 이대리가 입사한지 얼마되지 않아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었고, 그 분은 기존 임원들이 유독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것 같다. 이제 겨우 앞가림을 하겠거니 꿈과 환상을 가지고 공기업에 입사한 사회초년생에게 현실은 가혹했다.


사람들은 마치 그 직급이 영원할 것처럼 군다. 하지만 회사는 생각보다 냉정해서 한 사람을 오래 앉힐 생각이 없다. 정권이 바뀌면 나가는 건 순식간이다. 그런데, 멍청한 임원들은 그걸 모른다. 평생 ‘시키는 사람’일 것처럼 거만하게 굴다가 어느 날 사라진다. 그리고 그 뒤에는? 용역업체나 연관된 다른 회사에 기웃거리는 신세가 되겠지. 그때 가서는 세상 좋은 사람인 척하겠지.


임원들이 짤리는 방식은 퇴근시간 전에 건물 밖으로 나가서 다시 못 돌아오게 하는 방식이다. 어떻게 보면 피도 눈물도 없이 야반도주하듯 짐을 싸서 허겁지겁 나가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짐을 싸서 나가는 임원들은 오히려 양반이다. 충격에 휩싸여 집에 간 임원들은 간혹 회사로 전화해서 ‘본인의 짐을 싸서 보내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 예전에는 고분고분 ‘네’라고 대답했겠지만, 지금 와서 그 짐을 싸서 보낼 사람이 누가 있을까. Gen Z가 많은 지금의 회사에서는 ‘제가요? 왜요?’라고 대답하겠지. 그래서 임원의 뒷모습은 씁쓸하다.


어쨌든, 그렇게 나갔던 그 미친 임원이 얼마 전 이대리가 속한 부서에서 발주한 경쟁입찰 용역 과제의 제안사 임원이 되어 전화가 왔다. "예전에 우리 잘 지냈잖아"라며 친한 척을 하는 태도에, 이대리는 겉으로 티 내지 않았지만 역겨운 기분에 PT 발표 평가일에 최저점을 줘야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사람은 상황이 바뀌면 태도가 달라진다고 하지만 그래서 더 역겹다.


마침내 PT 발표 당일,

깔끔하게 뒤로 넘긴 머리와 고급 정장으로 애써 숨겼지만 어딘지 모르게 초췌한 모습으로 그 임원이 나타났다.


"이사원~ 아니 이대리님, 오랜만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대리는 순간 본인이 잘못들었나 생각했다. 반말과 욕설은 기본으로 장착하고 있던 분이 이대리'님'이라니, '잘 부탁드립니다'라니...?! 목 관절이 몇 개쯤 없으리라 생각될 정도로 고개 숙이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 정중하게 허리 굽혀 인사하며 두 손으로 명함을 건네는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발표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직원들에게 폭언하며 업무 지시를 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떨리는 목소리만 기억에 남았다. 얼마나 긴장을 하셨는지 화면을 비추는 레이저 포인터가 요동쳐서 내용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대리는 죄를 지은것만 같아 마음이 심란 해졌다. 그 임원이 회사를 떠난 후에도 마지막 모습을 안주거리 삼아 동료들과 비웃었던 자신이 문득 부끄럽게 느껴졌다.


[출처] 1호선 민달팽이 이야기_2화|작성자 1호선 민달팽이


이전 01화민달팽이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