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달팽이의 이야기

보증금 500에 월세 35, 4평짜리 원룸에서 오늘도 억지로 눈을 뜬다.


상가 건물이라 웃풍이 심해서 제법 춥다. 바닥은 따뜻한데 입김이 나온다.


소위 신의 직장이라는 공기업 대리 정도면 깔끔한 오피스텔에 살면서 아반떼는 끌고 다닐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빠 병원비를 보태고 나면 남는 게 없다.


그렇게 구로역 신호 장애로 하염없이 지연되는 1호선을 기다린다.


"...전동차는 여러 사람이 함께 이용하는 공간이오니, 스마트폰 등 휴대기기를 사용할 때에는 이어폰을 착용하시고 작은 목소리로 짧게 통화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유튜브] 여당 김의원은 부동산 투기 의혹이 있는데도 국밥 먹방이나 하고 이게 뭡니까~~?"


"[전화통화] 야 어제 우리 3차에 소주 몇 병 마셨냐? @#%@%#@#$"


안내방송이 무색하리만큼 역시나 조용한 날이 없다. 이 맛에 1호선 타는거지.


....


"이대리, 아침은 먹었어? 커피한잔 살게~ 같이 가자!"


김팀장님이다. 대리 승진하고 다른 팀에 오게 됐지만 사원 시절부터 자식처럼 챙겨주셨던 아버지와 다름없는 분이다.


햇반이 무슨 밥이냐며 혼자 사는 사람일수록 식사를 잘 해야 한다고, 고기를 먹어야 건강해진다며 일주일에 두 번은 삼삼오오 자취생 팀원들을 모아서 사비로 저녁을 사주시곤 했다.


그렇게 건강을 강조하시느라 다른 사람들한테는 묻지도 않고 맘대로 제로콜라를 시켜주고, 정작 본인은 혼자 소주잔을 기울이며 술기운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대리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편해졌다.


- "다들 평가 시스템 도입했을 때 기억나? 그때 이대리가 진짜 고생 많이했는데~~그치?"


사실 고생은 팀장님이 했다. 하필이면 입사 첫 해에 어쩌다가 중요한 프로젝트에 투입되어 모든 게 낯설고 불안했다. 그 때 마다 팀장님은 이대리를 다독여주곤 했다.


- "팀장님...이거 근데...하다 망하면 어떡해요?"


- "망하면 망하는거지~ 근데 뭐 이거 망했다고 회사가 망하겠니, 윗사람들 목이 날아갈 정도의 리스크가 생기겠니? 하면서 일단 해보고 안되면 그때 가서 생각해~"


하지만 언제부터 인가 이대리는 절대 망하면 안 되는 사람이 되었다. 수능을 앞두고 아빠가 갑자기 쓰러지셨을 때에도 가정 형편 상 재수는 꿈도 꿀 수가 없었다. 대학교에서는 성적 장학금을 놓치면 모든 게 끝장이다. 과외와 알바로 병원비와 생활비도 겨우 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졸업이 늦어지기라도 한다면, 만약 취업이 안돼서 돈을 못 번다면, 그래서 이런 굴레를 벗어날 수 없게 된다면...


이 회사에 다닌 지 6년째, 그동안 이직을 고민한 횟수는 나이보다 많고, 실행한 횟수는 없다.

이직을 고민하면서도 망설이는 이유는 절대 망하지는 않을 공기업이라는 점이 크지만 실은 김팀장 때문이다.


솔직히, 어느 회사나 그렇겠지만, 이대리가 생각하기에 회사에는 일을 하는 사람과 일을 만드는 사람, 그리고 일을 남에게 시키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이 회사는 전 직원이 일을 남에게 시키려고만 하다 보니, 결국 이대리 같은 일개미에게 모든 업무가 몰린다. 그리고 이 구조를 모두가 알고 있다. 부서에 일을 아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결국 어떤 일이든 이대리에게 오게 되어 있다. 이대리도 그걸 안다.


하지만 김팀장은 다르다. 일이 몰리는 걸 알면서도 덜어주려 노력한다. 야근할 때 커피를 한 잔이라도 사다 주고, 헛소리하는 임원들 사이에서 적당히 방패 역할도 해 준다. 회사에서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게 어딘가 싶다.


이대리는 회사를 다니면서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라는 사람을 너무 많이 만났다. 롤모델을 찾는 게 가장 어리석다고 생각하게 된 것도 그래서다. 나이 들어서도 제 몫을 하는 사람, 적어도 김팀장처럼 따르는 직원이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본다.


업무 특성상 경영진을 대할 일이 잦은데, 이대리는 직급이 높아질수록 인성이 반비례하는 건 거의 과학이라고 생각한다.


한 번은, 이대리가 사원이었던 시절에 무리한 범위의 정부 과제를 가져와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라'며 윽박지르던 임원이 있었다. 막무가내인 임원 앞에서 김팀장도 속수무책이었다. 어쩔 수 없이 시키는 대로 울며 겨자 먹기로 말도 안 되는 내용을 밤새 가며 김팀장과 이대리가 처리하는 동안, 그 임원은 그걸로 생색내기 바빴다. 그리고 몇 달 뒤, 그 임원은 짐을 쌌다. 그런 무리수들은 그 사람의 자리를 보존하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된 것이다.


어차피 나갈 거, 인심이라도 좋게 나가지. 그 임원이 나간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이대리가 근무하는 층의 사람들은 육성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드디어 미친놈이 나간다! 우리도 좋은 세상이 오는 거야!" 그 임원은 그 소리를 듣고도 방에서 나오지 못했다.


그러나 기뻐하는 사람들 속에서도 이대리는 뭔가 쎄하다는 생각을 했다. 철밥통이라 생각했던 공기업에서 사람이 짤리기도 한다니... 이게 맞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