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호선 민달팽이 이야기
이대리가 입사하기 꽤 오래전부터 '공공기관 지방이전'과 같은 아젠다는 정치인들 공약으로 종종 언급되곤 했다. 수도권 인구 과밀을 해소하기 위해 공공기관을 지방으로 옮긴다는 것이다. 매년 어떤 기관이 어디로 간다더라는 소문은 돌았지만 다들 우리회사는 아니겠거니 생각했다. 그래서 이 회사에서도 처음에 누군가가 지방이전 계획서를 그럴싸하게 작성해서 정부에 제출했을테고, 해가 바뀌면 또 다른 담당자가 의례적으로 복사 붙여넣기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진짜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어르신들이 회사에 몇번 왔다 갔다 하는 것 같더라니... 내년 연말까지 지방 혁신도시로 이전이 확정되었다고 한다. 계획서를 보완해서 정부에 다시 승인을 받으라고 하는데 그 내용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지금 쓰고 있는 청사는 언제까지 어떻게 처분할지, 처분하면 얼마를 이전 비용에 보탤 수 있는지, 새로운 청사는 임차를 하게 된다면 예산이 얼마가 필요한지, 이사 비용은 얼마나 쓸 것인지, 이주 후에 업무 정상화는 어떻게 할 것인지, 몇 명이나 이주할 것인지, 이주 초기에 직원들 통근은 어떻게 지원할 것인지 등등 구체적인 계획을 완성해서 진짜 이사를 가야한다.
공기업에서는 무언가 새로운 일이 있으면 TF가 생긴다. 얼마 전까지 회식만 잔뜩 하고 실제로 개선된 점이 하나도 없는 회식문화 개선 TF에 이어서 이번에는 '지방이전 TF'가 만들어졌다. 팀장들 중에서 연차가 높은 김팀장님이 TF장이 되었고, 청사 및 비품 관리를 맡고 있는 총무팀은 전원 투입되었다. 이대리는 이사회 지원 업무를 하면서 외부 전문가 섭외도 잘했고, 지금은 정보 공개 업무를 담당해서 회사 현황을 잘 알고 있으니 도움이 되리라는 임원들의 등쌀에 어거지로 합류하게 되었다. 이사회 지원, 정보 공개와 지방이전 업무는 무슨 연관성이 있는건지 이대리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사실 업무만큼이나 힘든건 새로운 곳으로 떠나야 한다는 불안감이 컸다. 아빠의 빈자리가 익숙해질 새도 없이 경기도에 있는 가족들과 서울 자취방을 뒤로하고 지방에 간다니 세상에 혼자 남겨지는 것만 같았다. 어떤 이들은 당장 회사를 때려치고 이직해야겠다며 노발대발하기도 했고, 일부는 주말부부를 하게 되었다고 기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회식하고 집에 늦게 들어가도 뭐라할 사람이 없어서 그런건가? 하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는 사람들은 그저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대리도 생각이 많아졌지만 감상에 젖을 여유가 없었다. 수년 전 담당자가 임의로 산정한 예산 범위 내에서 계획을 구체화하는 건 상당히 곤욕스러운 일이다. 이사 업체를 섭외하는 것만 하더라도 그간 물가가 많이 올랐기 때문이다.
"사장님, 저희가 비용을 더 쓸 수 없어서 그런데 어떻게 안될까요...?"
"아니 몇 년 전에 견적 드린 금액을 가지고 지금 그대로 해달라니 참..."
"서류는 스캔해서 파일로 정리하구요, 실물은 거의 버리고 갈 거에요. 그럼 좀 괜찮지 않으세요?"
"서류 몇 박스가 없다고 하더라도 사람 쓰는 건 똑같다니깐요!"
이대리는 하루종일 온갖 업체들에 전화를 돌리며 읍소를 하고나면 진이 빠졌다. 그나마 TF장이 김팀장님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사는 김팀장님 아이디어로 인부를 덜 쓰는 대신 직원들이 주말에 출근해서 포장을 미리 해두는 선에서 가격 협상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통상 공공기관은 외부 업체와 계약을 할 때는 비교견적을 받아서 해당 업체가 최저가라는 증빙자료를 첨부해야 하는데, 이것도 이대리가 직접 하기로 했다. 예컨대, A업체와 1천만원에 계약하기로 했다면 증빙자료로 1천만원보다 높은 다른 업체들의 견적서를 2~3개 정도 첨부하는 식이다. 견적서를 새로 받는 것도 일이니 관행적으로 A업체에 비교견적을 좀 받아달라고 요청하곤 한다. 하지만 억지로 낮은 가격에 해달라고 부탁을 해둔 상황에서 이런 번거로운 일까지 업체에 부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야근이 많아지면서 김팀장님과의 저녁 식사자리도 부쩍 잦아졌다. 수시로 진행상황을 점검하고, 본인이 직접 개입해서 해결하기도 하고, 임원들에게 불려가서 보고도 해야하니 누구보다 분명 어깨가 무거운 것만 같았다. 아이들 학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주말부부를 해야하는 심정은 오죽하랴... 그 와중에 지하철이 일찍 끊겨서 김팀장님은 거의 회사에서 살다시피 하고 있다. 힘든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부쩍 수척해지는것만 같았다.
"요즘 바빠서 잘 씻지를 못해서 그런가, 온몸이 근질근질하네"
"잠깐 사우나라도 다녀오실래요? 지금까지 정리된 자료는 제가 취합하고 있을게요"
"아 이대리 그럼 미안한데 부탁 좀 할게~"
그렇게 지방이전 TF 멤버들은 오늘도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