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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omBtoP Feb 28. 2024

"자유민주주의"를 살아가는 당신은 진정 자유로운가?

칼 마르크스의《공산당선언》을 읽으며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와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


0. 들어가며    


지금으로부터 180년 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를 유럽에 떠돌고 있는 유령이라 말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공산주의는 전 세계 어디서도 자리잡지 못한 채 떠돌고 있는 유령으로 보인다. 현실사회주의의 실패와 정치에 관한 무관심 속에서 공산주의는 유의미한 세력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자유 민주주의”를 살아가는 우리는 진정 자유로운가? 그렇다면, 진정한 자유란 대체 무엇인가? 마르크스가 이야기했듯 “국가 형태들이 얼마나 자유로운지의 여부는 ‘국가의 자유’를 얼마나 제한하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다시말해 “진정한 자유”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사회 위에 군림하고 있는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 즉 “국가”로부터의 포획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사유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에도 『공산당 선언』을 읽으며 공산주의의 “견해”, “목적” 그리고 “경향”을 다시금 공공연하게 표명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본 발제문에서는 『공산당 선언』이 쓰여지게된 당대의 배경을 탐구하고 그 의의를 살펴보며, 각 장마다의 내용을 요약한 후 현 시점에서 “선언”이 가지는 의의를 발제자의 생각을 더하여 제시하도록 하겠다.  

   

1.『선언』의 배경과 의의     


『공산당 선언』은 1848년 초에 쓰여졌다. 이 문제적인 저작의 지은이들은 두 명의 독일 혁명가였다. 정치철학자 칼 마르크스(1818~1883)와 기업가 프리드리히 엥겔스(1820~1895)는 1847 마지막 몇 달 동안 공산주의자동맹에서 위임받아 『공산당 선언』(이하 『선언』)을 작성했다.


 『선언』이 등장한 1848년은 인류의 역사를 뒤흔든 소요의 해이다. 유럽 대부분의 주요 대도시에서 혁명이 발발해 여러 왕조가 무너지고 코뮌이 수립되었으며, 바리케이드 곳곳에서 인간의 평등이 제창된 것이 바로 이 해였다. 데이비드 하비의 저서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에 묘사된 1848년 파리의 상황을 살펴보자. 

    

1848년의 파리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온 사방에서 굶주림과 실업과 빈곤과 불만이 팽배했고, 사람들은 생계수단을 찾으려고 도시로 몰려들었고, 그 가운데 많은 수가 파리를 중심으로 모였다. 공화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은 군주제와 상대하려는, 적어도 그것이 애초에 약속한 민주적 개혁을 요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런 개혁이 일어나지 않을 때 혁명의 시기가 도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항상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은 한없이 계속되었다. 1840년에 벌어진 파업과 거리 시위와 봉기 음모는 저지되었고, 그들의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판단하건대, 이번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했다. 1848년 2월 23일 카푸친 대로에서, 외무성 앞에서 벌어진 별로 크지 않은 시위가 당국의 통제 범위를 벗어났고 진압부대가 시위자들에게 발포하여 50명 가량을 죽였다.      


 이렇듯 유럽에 점차적으로 혁명의 분위기가 감돌자 19세기 초의 유럽 왕족들은 권위주의 정부, 무자비한 검열, 첩자망 등의 도움을 받아 왕권을 굳게 부여잡았다. 마르크스를 비롯한 당대의 수많은 급진주의자들은 각국 정부의 정치적 소요를 해결하려는 시도로 다른 유럽 나라로 추방을 당하곤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갖가지 급진주의 사상이 들불처럼 번지게 하고, 망명 혁명가 집단이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시기에 나타난 초기 공산주의자 집단은 응집력 있는 이데올로기의 틀로써 존재한 것이 아닌 유토피아주의, 프랑스의 평등주의, 기독교 이상주의 등이 뒤범벅된 형태로 존재했다. 공산주의자동맹의 원형인 의인동맹 역시 흐릿한 정체성을 가진 비밀결사 중 하나에 불과했다. 마르크스는 1843년 런던으로 망명한 의인동맹의 지도자 일부를 만나게 되었다. 얼마 안 있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의인동맹에 직접 들어가게 되어, 그들을 혹독히 비판하는 과정을 거쳐 공산주의자동맹으로 재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우여곡절 끝에 조직된 공산주의자동맹에서 1847년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강령 작성을 위임받게 된다. 하지만 당시 동맹은 비밀결사의 성격이 남아있어 은밀한 ‘입문 의식’과 그걸 위한 ‘신앙고백’으로서의 강령 작성을 원하였다. 1847년 6월 엥겔스가 쓴 『공산주의자의 신조 표명』이라는 제목의 초안이 로마 가톨릭의 교리문답에서 차용한 문답 형식으로 구성된 것도 이때문이었다. 마르크스는 혁명가들이 왜 자신의 견해와 의도를 감추어야 하는지 반문했다. 당시에는 해체된 의인동맹에는 ‘비밀결사’ 형식이 맞았을지 모르지만, 새롭게 결성된 공산주의자동맹은 동맹의 의도를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인류의 해방”과 같은 어정쩡한 감상주의적 요구를 한층 향상시켜 부르주아지 타도,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 계급 적대에 기초한 낡은 부르주아 사회의 철폐, 계급과 사적 소유가 없는 새로운 사회의 건설 등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렇게 확대된 야심에 걸맞는 『선언』은 지적, 정치적 분수령의 시기를 지낸 마르크스의 손에 혼란스러운 여러 사상이 가차없이 폐기되며, 하나의 응집력있는 철학으로 나아가기에 이르렀다. 마르크스가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에서 “철학자들은 단지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기만 해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듯, 『선언』은 혁명의 장애물이 될 뿐인 낭만주의, 유토피아주의를 폐기하고 계급투쟁이라는 역사적 과정에 참여하여 자본과 맞서 싸우는 것을 요구한 것이다.


 『선언』이 나온지 몇 주 되지 않아 파리에서는 혁명이 일어났다. 마르크스는 파리로 갔다. 그리고 독일로 갔다. 그는 다시 1849년 여름, 독일을 떠나 파리로 갔다. 그리고 1849년 8월, 영국으로 갔다. 이 두 해 동안 마르크스는 그의 노선들을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검증해본 셈이다. 그 과정 하나하나가 그의 사상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기는 하겠으나 이미 그 뼈대는 갖춘 다음이다. 혁명의 과정에서 마르크스가 보여준 태도는 선동가가 아니었다. 그는 혁명을 위해 노동자를 준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론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2. 『선언』의 내용     


본문 첫 페이지를 넘겨보면, 여섯 개의 문단으로 이루어진 글이 있다. 이 『선언』을 ‘이끄는 말’은 널리 알려진 문장으로 시작한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더 읽어나가다 보면 이 책의 제목이 왜 『선언』으로 지어졌는지, 그 이유가 등장한다. “지금이야말로 공산주의자들이 전세계 앞에 공공연하게 자신의 견해와 자신의 목적과 자신의 지향을 표명하여”라는 말이 그것이다. 이 문장에 따르면 “선언”의 의미는 견해, 목표, 지향을 공공연하게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제목의 의미를 반추해 보았을 때, 또 하나 의문이 드는 것은 “왜 사회주의란 말을 쓰지 않고 공산주의라는 말을 썼는가?”이다. 이에 대한 엥겔스의 해명이 1890년 독일어판 서문에 명시되어 있다.      


 “『선언』이 나왔을 때, 우리는 그것을 사회주의 선언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1847년에는 사회주의자라고 하면, 두 종류의 사람들로 이해되었다. 그 하나는 다양한 공상적 체계들의 추종자들, 특히 영국의 오웬주의자들과 프랑스의 푸리에주의자들이었는데, 양자는 그 당시 이미, 점점 사멸해 가는 하찮은 종파로 쪼그라들어 있었다. 다른 하나는 극히 다양한 사회적 돌팔이 의사들로서, 이들은 자본과 이윤은 전혀 건드리지 않은 채, 그네들의 갖가지 만병 통치약과 온갖 종류의 미봉책으로 사회적 폐해들을 제거하려고 했었다. 어느 경우에나 :[그들은] 노동자 운동의 외부에 서 있으면서 오히려 ‘교양 있는’ 계급들에게 후원을 구하는 사람들[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노동자들 중에 단순한 정치적 변혁들의 불충분함을 확신하고 있었던, 사회의 근본적 개조를 요구한 그러한 부분, 그 부분은 그 당시 자신들을 공산주의자라고 불렀다. … 1847년에 사회주의는 부르주아 운동을, 공산주의는 노동자 운동을 의미했다.”     


엥겔스에 따르면 당시 ‘사회주의’는 세력도 보잘것없었고, 자본과 이윤이라는 몸통은 건드리지 않은 채 온갖 종류의 미봉책만 내놓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반대로 ‘공산주의’는 정치적인 해결책 말고도 근본적인 사회개조를 요구했다. 이런 용어 규정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선언』은 당시 시대상황을 고려하며, 정치적으로 쓰여진 문서이다.


 첫 페이지를 계속 읽어나가면 알 수 있듯, 당시 보수 세력인 교황, 짜르, 메테르니히, 기조, 프랑스 급진파, 독일 경찰관이 ‘신성 동맹’을 결탁하여 공산주의라는 ‘유령’을 사냥하고 있었고, 반동적인 적수들을 낙인찍어 비난하기 위해 그들을 ‘공산주의’로 규정하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이런 사실로부터 ‘공산주의’는 이미 하나의 세력으로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선언』은 공산주의자들이 전 세계 앞에 공공연하게 표명을 해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1848년 당시 이렇게 공공연한 표명을 하는 것은 어렵고 위험한 일이었을 것이다. 작금의 한국에서도 그렇지 않은가? 당시 공산주의자들이 비밀결사의 형태로 활동한 것이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하지만 『선언』은 혁명가들의 전통적인 방식인 음모주의와 비밀 결사를 폐기하겠다고 이야기한다. 현실을 바꾸기 위해, 역사적 과정에 참여하여 맞서 싸우리라는 의지의 표명이다.


 『선언』은 네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장의 제목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 『선언』을 관통하는 이 첫 문장은, 그 시작부터 혁명적 측면이 드러난다. 당대까지의 역사를 기존과 달리 ‘유물론적’으로 분석해 놓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자들에게 단결해야 한다는 확신을 불어넣으려면 역사를 완전히 새롭게 해석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다. 이러한 유물사관에서 이야기하는 ‘물질’은 경제적 의미의 물질을 뜻하는데, 이에 따라 경제적인 활동을 토대로 역사를 판단하는 관점을 유물사관이라고 한다. 이런 관점을 통해 역사를 바라본 마르크스는 생산을 지배하는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 사이의 갈등이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라고 보았다. 


 뒤이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부르주아 계급의 극적인 등장 과정에 대하여 서술한다. 부르주아 계급은 전 지구를 자신의 무대로 삼은 최초의 인간 집단이며, “장구한 발전 과정”을 거치면서 “생산 양식 및 교류 양식에 있어서의 일련의 변혁”을 불러왔을 뿐만 아니라 그에 근거하여 기존의 세계를 지배하던 모든 생산 방식과 그에 얽매여 있던 인간관계를 전면적으로 전환시켰다. 그들은 “역사에서 극히 혁명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들은 인간의 전면적 가치를 철저하게 축소시켜 “인격적 가치를 교환가치로 용해”시켜 버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노골적인 이해 관계, 냉혹한 ‘현금 계산’ 이외에 아무런 끈도 남겨 놓지 않았다.” 그들은 가족관계도 전면적으로 재구성하여 “그것을 순전한 금전 관계로 되돌려 놓았다.” 그들은 전 세계로 나아가 “모든 민족들을, 가장 미개한 민족들까지도 문명 속으로 끌어 넣는다.” 그들은 “농촌을 도시의 지배 아래 복속시켰다.” 그들은 “야만적 및 반(半)야만적 나라들을 문명국들에, 농업 민족들을 부르주아 민족들에, 동양을 서양에 의존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눈부신 부르주아의 혁명적 업적도 잠시, 『선언』은 “그토록 강력한 생산 수단과 교류 수단을 마법을 써서 불러내었던 현대 부르주아 사회는, 주문을 외워 불러내었던 저승의 힘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된 마법사”와 같이 “과잉생산”이라는 전염병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생산성이 증진됨에 따라 노동자는 단순한 기계 부속품으로 전락하게 되고, 그마저도 기술 증진에 따른 자동화의 도입으로 인해 “잉여” 노동력 신세가 된다. 이런 잉여 노동력을 최대한 많은 이윤을 얻길 원하는 자본이 가만 둘리가 없다. 이렇게 사람이 잘리면 많은 수의 대중은 가난해지고, 상품은 넘쳐나는데 가난한 대중은 소비를 하지 못하는 “공황 상태”가 발생하게 된다. 자본에 내재된 모순이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부르주아지는 자신에게 죽음을 가져올 무기들을 벼려 낸 것만이 아니다; 그들은 이 무기들을 쓸 사람들도 만들어 내었다. 현대 노동자들, 프롤레타리아들을.”


 프롤레타리아의 노동이 갖는 숙련성은 더 많은 이윤 추구를 위해 생산성을 증진시키려는 자본의 요구에 의해 그 매력을 상실하고 만다. 그에 따라 남성 노동은 여성 노동에 의해 밀려나고, “성별과 연령의 차이는 노동자 계급에게 더 이상 어떠한 사회적 의의도 갖고 있지 않”게 된다. 또한 소경영자들도 상대적인 자본의 부족과 그에 따른 경쟁에서의 패배로 인하여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하고 만다. “이리하여 프롤레타리아트는 주민의 모든 계급들로부터 충원된다.” 자본의 발전에 따라 산출되는 계급, 이 프롤레타리아트가 바로 “혁명의 주체”인 것이다. 


 대공업의 발전에 따라 산출된 프롤레타리아트는 “처음엔 개별적 노동자들이, 그 다음에는 한 공장의 노동자들이, 또 그 다음에는 한 지역의 한 노동 부문의 노동자들이 그들을 직접 착취하는 개별 부르주아에 대항하여 투쟁한다.” 이 단계에서 노동자들은 전국에 걸쳐 “산재”해 있고, 경쟁에 의하여 “분열”되어 있다. 개별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는 각자가 모두 다르기 마련일 것이다. 마르크스가 제시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를 위한 길은 정당으로 “조직화”되는 것이다.      


“모든 계급 투쟁은 정치 투쟁이다.”     


 『선언』이 쓰여질 당시의 “정당”이란 말의 의미는 오늘날의 그것과 다를 것이다. 구체적 당 조직이 아닌 프롤레타리아트가 스스로 프롤레타리아트임을 자각하고, 그에 따라 정치적 조직화를 이루는 것을 뜻한다. “조직화”에 선행하는 것은 “계급의식”을 갖는 것이다. 여러 가지 정체성을 갖고 있는 “나”라는 개인이 “노동자”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되어, 그것을 “계급의식”으로서 고취시키는 것이다. 철학자 사르트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자적으로 스스로를 규정하여 계급화하는 것이다. 생각보다도 우리 주변엔 스스로 프롤레타리아임을 깨닫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부르주아의 끝없는 분열 책동에 휘둘리지 않고 “계급의식”을 갖게 하는 것이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가장 혁명적인 계급으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선언』 제2장의 제목은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들’이다. 여기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자들과 다른 노동자 정당이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며, 다른 점이 있다면 국제적으로 사고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중요성을 이해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공산주의 혁명의 프로그램을 서술하고 그에 따른 네가지 주된 비난, 즉 공산주의자들은 정당하게 일해서 번 소유를 폐지하려 한다, 자유연애를 도입하려 한다, 가족을 폐지하려 한다, 조국과 국적을 없애려 한다는 등의 비난을 논박한다. 그리고는 마지막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맺고 있다.      


“계급과 계급 대립이 있었던 낡은 부르주아 사회 대신에 각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하나의 연합체가 나타난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귀결에 따르면, 공산주의 체제는 “자유로운 개인”“창조적인 자아실현”을 목표로 한다. 자아실현의 온전성과 자아실현의 자유, 기회의 평등을 핵심요소로 갖는 이 “연합체”는 총체적 자유실현의 공간이다. 앞서 제1장에서 나타난 부르주아의 혁명적 업적 중 하나로 “문서로 보장된 혹은 정당하게 얻어진 수많은 자유들을 단 하나의 파렴치한 상업 자유로 바꾸어 놓았다.”는 구절이 있다. 근대의 보편적 합의로 얻어낸 “자유”마저도 부르주아 계급의 혁명을 피해갈 수 없어, 인간의 자유를 실현하는 모든 조건들과 요소들이 경제적인 차원으로 환원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것을 민주주의와 결합시켜 “자유 민주주의”라는 이념으로 표상한다. 이 자유주의에 토대를 둔 민주주의는 그 출발점이 만민의 자유로운 처지였으나, 결국엔 일부 자본가 계급의 자유로운 처지로 귀결되었다. 이런 “자유 민주주의”적 사회에선 정당과 국가권력은 그저 부르주아 계급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처리해 주는 “부르주아 계급 전체의 공동 업무를 처리하는 위원회”일 뿐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라 마르크스가 『고타 강령 비판』에서 “자유는 사회 위에 군림하는 국가를 사회에 완전히 종속되는 국가로 전환시키는데 있으며, 오늘날에도 역시 여러가지 국가 형태들이 자유로운지의 여부는 '국가의 자유'를 얼마나 제한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라고 말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작금의 대한민국에서 우리는 민주주의가 확고히 실현되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개인이 주권을 행사하는 것이라곤 5년마다 양당 중 집권당을 하나 선택하여 교체할 수 있는 정도에 그치지 않는가? 단순한 정치적 자유의 보장과 실현 이상의, 사유재산권의 법적 보장을 넘어선 민주주의의 확장. 즉 “진정한 민주주의”는 형식적인 정치적 자유, 사유재산의 자유 이상의 것이며, 이는 『선언』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천명하는 민주주의와 닿아있다.


 『선언』 제2장에서 “우리는 이미 앞에서 노동자 혁명의 첫걸음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 계급으로의 고양, 민주주의의 쟁취라는 것을 살펴보았다.”라고 말한다. 이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부르주아 계급을 타도하고 나아가 사회의 계급적대 자체를 철폐하고, 경제적 착취관계를 완전히 제거하여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지배계급으로 올라서는 것이 민주주의의 쟁취이다. 공산주의는 “소유 일반의 폐지가 아니라 부르주아적 소유의 폐지”를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소유는 일반적으로 자유주의 국가에서 사유재산이라는 법적 장치로써 보장된다. 따라서 공산주의가 목표로 하는 “부르주아적 소유의 철폐”는 동시에 “자유주의 국가의 사유재산 철폐”와 같은 함의를 갖는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에 의해 축소된 인간의 전인격적 면모의 회복을 시도한다. 근대 사회는 개인의 주관성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정립한다. 개인의 주관성은 근대의 모든 부분에서 기본 원리로써 작용한다. 그런데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서 주관성의 ‘참된’ 현상 형식인 인격은 “부르주아적 인격”이며, 자유 역시 “부르주아적 자유”이다. 재산을 갖지 않는 이는 인격도 없고 자유로울 수도 없다. 이런 의미에서 『선언』의 기획을 보았을 때, “부르주아적 소유의 철폐”“인간의 소외된 본질의 회복”이라는 인간주의적 기획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선언』 제3절에선 ‘반동적 사회주의’에서 ‘공상적 사회주의’에 이르는 여타의 자칭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공산당의 입장을 제시하고 있으며, 4절은 각 나라별로 자신들이 지지하는 세력을 나열하고 있다.


3. 오늘날, 『선언』이 갖는 의의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선언』을 작성하며 개진한 원리는 자본이 갖는 모순을 드러내고, 그에 대한 대안을 타당하게 제시해준다. 하지만 『선언』 이후 180년이란 시간이 흐른 지금, 이러한 원리가 현실화되었는지는 의문이다. 공산주의자의 자본주의 비판은 타당하지만 자본주의는 여전히 폐기되지 않았고, ‘현실사회주의’로 역사 속에 등장했던 소비에트는 왜곡과 쇠퇴의 길을 걸어 끝내 몰락하고 말았다. 


오늘날 한국은 여전히 부르주아 계급 지배의 헤게모니가 관철되고 있는 국가이다. 19세기 일본 제국주의의 하위 단위로 편입되어 자체적인 근대화를 이뤄내지 못하고, 독립 이후에도 미국의 제국주의 질서 아래에서 80년대 민주화 이전까지 반공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속에 놓여있었다. 한국에 살고 있는 대중은 70년대에 형성된 성장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성장이란 가치를 위해선 근대 이후 인류가 보편적으로 성취한 가치도 유보할 수 있다는 데에 상당히 합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중의 상식은 성장 이데올로기를 사회적 의제로서 강력하게 지지한다. 사회적 맥락을 상실한 개인적 부에 대한 찬양과 추구, 특권층으로의 처절한 지위 상승 노력, 약자에 대한 가학적 억압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부르주아 계급 지배 헤게모니에 종속된 대중들을 혁명의 주체로서 고취시키고 더 나아가 조직화를 해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단일하고 강력한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어 있는 동시에 복합적인 처지를 갖고 있는 대중들이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지배 계급의 이해관계 속에 소외된 대중을 포섭하고 여러 정체성을 갖고 있는 개인들을 의식화하여 주조해내기 위해서는 노동자 당의 역할이 필요할 것이다 근대를 살아가는 개인의 자발성에 기초한 조직체를 구성하고 대중들의 정체성 속에 같은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지점이 있음을 깨닫게 하여 그들을 조직체의 일부로 포섭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또한 그렇게 생겨난 조직체들을 하나로 묶어주기 위해 국가에 대항하는 정당의 이데올로기를 부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를 부여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그 답은 어떻게 세계관을 해석하냐에 달려있다. 각 주체들이 세상을 인식하고 판별하는 기준점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이 가진 이해관계의 방향성을 조정한다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대항할 수 있는 하나의 권력을 조직할 수 있을 것이다 . 180년전 마르크스가 세계를 통찰하며 피력한 견해가 여전히 생명력을 가진다는 것은 놀랍지만 한편으론 비참하기도 하다.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세계는 여전히 변혁을 이뤄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선언』을 다시 읽고 그 견해와 목적 그리고 경향을 공공연하게 표명하는 것은 우리가 나아갈 길을 재차 확인하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시금 만국의 노동자들의 단결을 위하여, 소외된 인간 본질의 회복을 위하여!


 ❦ 참고한 책들의 서지사항은 다음과 같다.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김태호 옮김「공산주의 선언」 박종철출판사, 2016 

데이비드 보일 지음, 유강은 옮김「세계를 뒤흔든 공산당 선언 」그린비 , 2005 

강유원 지음「 강유원의 고전강의 공산당 선언」뿌리와이파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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