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구한 철학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많은 철학자들은 진리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물음이라는 존재가능성을 갖고 살아가는 인간으로써 이 세상은 어떻게 이뤄졌는지, 더 잘 살아가려면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고민함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인간들은 진리가 무엇인지 따져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플라톤으로부터 내려오는 (물론 그 이전의 철학자도 있겠지만) 전통적인 철학의 진리 개념은 "개념과 실재의 일치"이다. 어찌보면 간단해 보이는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우선적으로 인식주체인 우리가 대상을 제대로 파악하는가?라는 문제를 먼저 해결할 필요가 있다.
대상(Object)은 물자체와 현상으로 나뉘어진다. 물자체는 Thing in itself로서 그 자체로 있는 것을 의미하고, 현상은 우리의 인식에 주어져 드러나는 대상을 뜻한다. 앞서 말했듯 인식주체에 주어지는 것과 실재하는 대상과의 합일이 곧 명증성이요 진리인데, 물자체가 우리에게 제대로 현상으로 주어지는지 알 수가 없으니 철학자들은 이내 딜레마에 빠져버리고 말게된다. "내가 인식하는 이 연필이 진정 연필 그 자체가 맞는건가? 각도에 따라서도 달리보이고, 심지어는 내 기분에 따라서도 달리보이는데!" 그러자 칸트는 말한다. "물자체가 우리에게 현상으로 드러나는 관계(지향성)이 제대로 된 것인지 파악하는 방법이 궁금해? 대상의 가능근거로서의 "나"가 되면 된다!"
칸트는 새롭게 대상의 가능근거로서의 주체 개념을 제시한다. "초월적 통각(transzendentale Apperzeption)"인 자기의식이 그것인데 한마디로 말하자면 대상을 늘 담고 있는 행위들의 통일로써의 자아이다. 이 자기의식(자아)은 [인식+대상]인 관계이다. 새롭게 제시된 이 주체의 관점에선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 대상(물자체)은 더이상 따져볼 필요가 없는 것이 된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대상은 현상이고 명증성은 보장된 것이 된다. 다시말해 진리는 이제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닌, 우리에게 드러나는 현상 자체가 된 것이다.
“이제까지 사람들은 모든 우리의 인식은 대상들을 따라야 한다고 가정하였다. 그러나 대상들에 관하여 그것을 통해 우리의 인식이 확장될 무엇인가를 개념들에 의거해 선험적으로 이루려는 모든 시도는 이 전제 아래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 번, 대상들이 우리의 인식을 따라야 한다고 가정함으로써 우리가 형이상학의 과제에 더 잘 진입할 수 있겠는가를 시도해 봄직하다. 이런 일은 그것만으로도 이미 대상들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전에 대상들에 관해 무엇인가를 확정해야 하는, 요구되는바 대상들에 대한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에 더 잘 부합한다. 이것은 코페르니쿠스의 최초의 사상이 처해 있던 상황과 똑같다." (B판 머리말, B XVI)
앞서 말한 초월적 통각이란 말의 "통각(Apperzeption/Apperception)"에 대해 설명하자면, Ap와 perception가 합쳐진 용어로 각 인식을 통일하는 기능을 뜻한다. 아래의 도식은 초월적 통각으로 나타나는 자기의식(지성)의 작용(Aktus/act)을 보여주는데, 칸트는 이 자기의식을 "논리적 주체"라고 칭하고 데카르트에서처럼 실체(res)가 아닌, 경험에 주어진 표상을 종합하는 "행위(Aktus)"로서 파악한다.
S는 주체, O는 객체, 각 경험의 주체를 i라는 자아로 생각하자
우리는 시간성속에서 대상을 경험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대상을 같은 대상으로 보기 위해선 항상 동일한 내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 주체는 앞에서 말한 자기의식의 작용으로 매순간 경험을 할때만 등장하는 늘 행위하는 주체이다. 정리하자면 자아는 끊임없이 대상의 문맥을 내 안에 담아내는 행위자인 것이다.
우리는 칸트가 주관하는 순수 이성 비판의 법정에서 자기의식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대상성을 그 자기의식에 의해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 법정이 진행되며 우리 이성 능력 일반에 대한 한계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 그동안 물자체로서의 대상이 아니라, 현상으로서의 대상에 대해서만 다뤘잖아? 그러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는 것들은 어떡해?" 칸트도 이 부분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영역을 나누는(Krinein) 선을 하나 그어주게 된다. 이것이 비판(Kritk/Critique)의 의미이다.
인간은 예지계의 영역을 인식할 수 없고, 경험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기만 할 수 없던 칸트는 "인식(erkennen/cognize)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사고(denken/think)할 수는 있어야 함이 여전히 유보되어 있다."고 말한다. 앞서 살펴보았던 현상계(이론의 영역)에서의 Aktus가 끊임없이 대상을 매개하고 주관의 형식을 부과하는 행위인 통각임은 밝혀졌다. 칸트는 실천의 영역에서도 Aktus가 있음을 말하는데, 이것은 자율성(Autonomie)이다. 스스로 도덕법칙을 부과하는 행위를 뜻한다. 이렇게 영역을 분리해낸 칸트는 실천이성의 과제를 제시한다. "어떻게 예지계의 자유(이념)를 현상계에 끌어내려 행위할 것이냐!" 이것은 이후 독일 관념론자들에게도 공통적으로 부여되는 과제가 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 과제를 풀어나가는 저마다의 고유한 방식이 있다는 점이다. 칸트는 신의 유무와 같은 이율배반적인 문제에 부딪힐 때, 그것은 다른 영역의 일이니 대립적으로 공존 가능하다고 본다. 우리의 인식이 유한한 이상 해결이 불가하다고 보기에, 가닿을 수 없는 점근운동만 반복하는 것이다. 이후 철학자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이념의 실현을 위해 두 세계의 갈등이 심화되는 경향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