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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동민 Feb 26. 2024

당신들의 천국에서 우리들의 천국으로 1

한야 야나기하라 소설, 투 파라다이스 1(시공사, 2023)을 읽고 1

 

  1. 나는 법원에서 일하는 공무원이다. 현재는 개인회생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부채를 감당하지 못한 채무자가 재산과 소득을 감안한 변제계획안을 내면 법원이 심사해서 인가결정을 한다. 채무자가 계획대로 3년을 성실하게 수행하면 면책을 받는다. 투 파라다이스 1(원제: To Paradise, 이하『파라다이스』, 이후 페이지만 표시)을 읽고 수없이 전화를 걸어오는 채무자들의 목소리와 보이지 않는 얼굴을 생각했다. 주식이나 코인 투자 실패, 카드 빚 등 회생신청 사유도 제각각인데, 돈을 갚아나가는 과정에서 실직하거나 건강이 나빠져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폐지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들도 지난한 삶을 견디며 면책 이후의 낙원을 꿈꾸었을 것이다.


  2. 제목에서 시작하자. 낙원, 천국으로 번역하는 paradise는 정원(garden)을 뜻하는 원시 이란어 paridayjah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기독교의 에덴동산이 연상된다. ‘낙원을 향하여’ 걸음을 내딛는 사람에게 지금 발 디딘 여기는 무엇일까. 지옥인가, 지옥은 아니라도 꿈꾸던 이상향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파라다이스』에는 두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제1부(워싱턴 스퀘어)는 1893-94년의 자유주 뉴욕을 배경으로, 제2부(리포-와오-나헬레)는 1993년-94년 뉴욕과 하와이가 무대다. 개별적인 두 작품이지만 이란성 쌍둥이처럼 같은 이름이 여럿 등장하고(데이비드, 찰스, 에드워드 등) 주제 의식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제1부「워싱턴 스퀘어」를 보자. 19세기 말 북 아메리카는 자유주, 식민주, 미국, 서부 등으로 나뉘었다. 데이비드 빙엄은 동성애가 허용되는 자유주 뉴욕에 사는 1866년생 남성이다. 빙엄 가(家)의 장남으로 조부 너대니얼 빙엄과 함께 워싱턴 스퀘어라는 저택에 사는데 다섯 살 때 부모가 죽어 조부 손에서 줄곧 자랐다. 고아원의 미술담당 교사로 일하다가 알게 된 음악교사 에드워드 비숍에게 반한 호모 섹슈얼이다. 데이비드가 성인이 된 후 사랑과 결혼의 문제로 관계 맺은 결정적 인물은 에드워드 외에 찰스 그리피스가 있다. 찰스 쪽이 중매결혼, 이성, 아폴론, “빙엄 브러더스의 문장(紋章), 세르바투르 프로미숨(Servatur Promissum), 지킨 약속이라는 문구”(28쪽)라면 에드워드는 자유연애, 정열, 디오니소스, 불확실한 미래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에드워드는 데이비드의 유일한 뮤즈다. 스물셋 에드워드는 식민지 출신으로 “다른 곳, 다른 존재에서 왔고”(103쪽) 신분 계급 차이도 분명하다. 에드워드는 어머니가 위중하다는 핑계로 휴가를 내고 잠적해 버리고 데이비드는 노심초사하며 그를 기다린다.  



- 1894년 3월 17일 보고서 중

  쿡 남매는 함께 두둑한 돈을 모았습니다. 그 돈에다가 추정컨대 에드워드가 외대고모에게 훔친 돈과 가엾은 D씨 부모로부터 받은 돈을 합쳐서, 그들은 서부에서 실크 직물 사업을 시작할 작정입니다. (중략) 필요한 것은 농장을 시작해서 처음 몇 년을 버틸 수 있게 해 줄 마지막 한탕이었죠. 바로 그때인 올해 1월, 에드워드 비숍이 빙엄 씨의 손자를 만난 겁니다. (231쪽)



  조부에게 도착한 에드워드에 실체에 관한 보고서. 에드워드는 데이비드의 재산을 노리고 접근한 듯하다. 동성애가 처벌받는 서부에서 사업을 벌일 작정이다. 다시 돌아온 에드워드의 변명은 “알고 보니 거짓은 아니었다, 적어도 완전히는.” (91쪽) 데이비드는 자유주를 떠나 에드워드와 함께 서부의 낙원을 향하여 떠난다.


  에드워드는 데이비드의 연인이자 사기꾼으로 의심되는 인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탈출할 수 없는 억압과 권태로 가득 찬 현실에서 데이비드의 내면에 숨겨진 욕망이자 그림자라고 생각한다. 가부장(patriarchy)의 지붕 아래서 조부의 바람대로 찰스와 결혼해 가정을 꾸린다면 외적으로는 안정적인 삶을 꾸릴 것이다. 그러나 그 선택은 현실에 대한 영원한 굴복이다. 벽에 있는 얼룩을 종일 망연히 바라보며 죽을 때까지 가부장적 남성성의 기준에 이르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갈 것이다. 억압된 분노와 무기력은 두려움을 완벽하게 감추는 은신처이기 때문이다. 퀴어 소설의 외피를 취하지만 어쩌면 이 소설은 가부장적 남성성의 억압이라는 보편적 주제에 중심을 둔 것 같다. 데이비드의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 두려워하는 대상을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 그는 찰스 그리피스를 선택할 수 없다. 손톱을 바짝 깎고 신발 끈을 질끈 묶고 문을 열어야 한다. 도드라진 현실의 요철에 걸려 넘어질 수밖에 없을 지라도 달려 나가야 한다. 나는 데이비드의 선택을 지지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것”(333쪽)이므로, 설사 실패하더라도 꿈에라도 그에게 사랑이 놀러오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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