셸리 리드의 소설, 『흐르는 강물처럼』을 읽고 2
■ 젠더와 인종, 변화와 환대
소설의 제1부(1948년-1955년)의 중심은 빅토리아와 윌슨 문의 만남이다. 토리 가족의 생활, 윌의 실종과 사체 발견, 토리의 임신을 다룬다. 미스터리 소설의 반전처럼 죽은 윌이 언제 짠, 살아 돌아올까 기대하기도 했지만 윌은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소설의 배경은 1930년대, 1940년대 미국 서부의 작은 시골 마을이다. 노예제 폐지(수정헌법 제13조, 1865년), 여성의 투표권 확대(동법 제19조, 1920년),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시민권과 투표권 부여(슈나이더법, 1924년) 같은 조치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시민권법(1964년)과 투표권법(1965년)이 등장한 이후에야 보편적인 투표권을 위한 최소한의 기준이 충족되었다. 또한 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 전쟁은 빅토리아 가족의 운명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오그(Ogden) 이모부는 참전용사로 두 다리를 잃었고, ‘루카스’는 1970년 입대했고, 그의 쌍둥이 형제 맥스웰은 징집될 뻔 했다. 빅토리아는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엄마, 이모, 사촌 오빠를 잃었다. 사고 이후 토리는 집안의 안주인으로 고정적인 성역할에 갇힌 채 살았다. 하루 세 번 울리는 기차의 경적소리로 시간을 가늠하는 “붙박이장, 가정부 같은 존재”(166쪽)였다. 그러다가 ‘윌슨 문’과의 만남이라는 ‘결정적 순간’을 맞아들인다. ‘윌’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은 팔딱거리는 물고기처럼 빅토리아의 삶을 지속적으로 고동치게 한다. “인간의 자라남을 결정짓는 순간은 영원히 존재한다.”는 카프카의 아포리즘이 생각났다.
빅토리아가 윌슨 문을 처음 만나는 장면을 보자. 빅토리아는 윌슨의 까만 얼굴과 구릿빛 피부, 때에 찌든 옷과 양손을 건조하게 묘사한다(19-20쪽). 남동생 세스(Seth)나 일꾼 포레스트 데이비스, 동네 사람들처럼 윌슨을 ‘인전’(Injun, 아메리칸 인디언의 비하), ‘서커먼 새끼’, ‘튀기’, ‘미개인’, ‘쥐새끼’ 라고 규정짓지 않는다. 보이는 그대로 한 인간으로서 윌슨을 마주한다. 그들의 사랑은 편견의 벽을 가볍게 뛰어넘고, 그 벽을 부순다. 진정한 환대는 조건을 뛰어넘는 사랑이다. 작가가 돌부리처럼 심어놓은 장면들에 걸려 넘어졌다. 동생 세스나 그의 친구들로 추정되는 자가 한밤 중 토리의 방 문고리를 흔든다. 문이 잠겨 있음을 확인하고 천천히 멀어지는 발걸음과 안도의 한숨. 여성으로서 느끼는 공포와 두려움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출산을 위해 가출을 선택한 빅토리아는 아들을 낳았고, 그를 포기했다. 수몰예정 구역의 집을 팔기로 결심했고 복숭아나무를 이식하기로 마음먹고 실행에 옮겼다. 새로운 정착지에서 알게 된 젤다와 교류하면서 빅토리아는 용기를 얻고 실존을 찾아나간다. 일련의 과정 하나하나가 빅토리아의 선택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윌슨 문에 관한 정보는 단편적으로 제시된다. 인디언 학교를 다녔고(235쪽), 탄광에서 일하다가 도망쳤으며(30쪽), 여인숙에서 도둑으로 몰려 위험인물로 현상금이 걸렸고(113쪽), 피부가 벗겨진 채 블랙 캐니언 바닥에 던져졌다는 전언(149쪽), 도망친 윌이 산막에서 며칠을 버티고, 마을에서 부랑자 취급을 당하는 ‘루비앨리스’의 집에 거주하며 빅토리아 주변을 맴돌았다는 사실 등. 나는 초등학교 학부모로서 오며가며 아파트 이웃과 이야기를 나눈다. “요즘 다문화 가정이 부쩍 늘어난 것 같다”, “몇 동 몇 호 누구는 어머니가 조선족인데 지방에서 일을 하고 아이는 이모가 키우고 있다”, “학군을 고려한다면 사는 동네의 분위기도 중요한 것 같다” 등의 말 들이다. 소설 속 서부 개척시대에 강제퇴거 당한 우트족에 관한 구절을 읽다가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았던 유대인, 반대로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땅에 정착촌을 건설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내쫓는 모습이 동시에 머리를 스쳤다. 열린사회는 이방인에게 관용을 베풀고 그들을 환대한다. 포용력이 있는 사회일수록 다양한 인종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든다. 유학생과 이민자, 이방인이 유입되는 사회는 역동적이고 창의적이다. 뉴욕, 샌프란시코, 런던, 베를린, 암스테르담 같은 도시를 보라.
이 소설의 씬 스틸러 ‘루비앨리스 에이커스’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가족을 잃고 마음이 부서져 외롭게 사는 노파, 세스가 ‘악마’라 칭한 루비앨리스에게 빅토리아는 마음을 연다. 하느님에게 그녀를 부디 도와달라고 은밀하게 축복의 기도를 드린다. 편견 없이 윌에게 마음을 열고 사랑을 건넸듯 빅토리아는 루비앨리스에게도 손을 건네고 보살폈다. 따지고 보면 누구나 이방인, 변방인이다. 인종, 젠더, 사회적 지위 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 주류가 될 수 없다. 조건이 조금만 달라지면 약자이자 소수자가 될 수 있다. ‘서울 거주, 자가 보유, 기독교인, 양성애자, 정규직 남성’도 비행기를 타고 유럽에 가면 순식간에 변방에 놓여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작품 속에서 윌이나 루비앨리스에 대한 혐오와 차별, 정부에 땅을 가장 먼저 판 빅토리아에게 가해지는 분노의 시선이 당신을 향할 수 있다는 말이다.
변화의 요구는 늘 저항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소리쳐야 한다.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강력한 벽은 침묵이다. 약자와 소수자를 위해 연대하고 적어도 기득권에 대해 침묵으로 동조하지 말아야 한다. 비판에 대한 두려움이 예상되고 혐오가 따른다 해도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인류는 지난한 세월을 거치며 자유, 인권, 평등 같은 보편적 가치를 게걸음으로 일구어 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런 점에서 빅토리아의 아들을 거두어 키운 ‘잉가 테이트’의 선언과 행동이 흥미로웠다. 원하지 않은 임신으로 학업과 작가의 꿈을 포기한 잉가가 빅토리아에게 전하는 글을 쓰고, 강압적인 남편에게 마침내 ‘헤어질 결심’을 선언한 부분이 와 닿았다. 다른 것이 공존하고 공생하는 땅에서 공진화의 새싹이 움튼다. 부딪치고 갈등하고 길항하는 곳에서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