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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수 할배 Aug 03. 2024

촌사람이 어떻게 미국 대학에 합격했을까?

(17화) 그러게요!

"모험은 그 자체만으로도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아멜리아 엠 에어하트)


"진도 촌놈이 어떻게 유학 갈 생각을 했오?" 


어느 날 같은 대학교 동료교수가 이렇게 물었다. 이 글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담고 있기를.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서는 한국의 대학교냐 미국의 대학교냐를 결정해야 했다. 나의 상황에서는 한국보다는 미국의 대학교가 더 적합하였다. 한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려면 일과 공부를 병행해야 하므로 힘이 들고, 학교가 다른 도시에 있다면 수업을 듣기 위하여 이동하는 시간도 소요되었다. 물론 어느 나라에서나 실력은 인정받아야 한다. 반면에 한국에서 공부하면, 직장을 유지하여 재정적인 부분에서는 큰 장점이 있었다. 미국에 유학을 가면 공부하는 시간이 많고 영어를 잘하게 된다. 


교원대학교 석사과정에 들어가면서부터 미국에서의 박사과정을 준비하였다. 대학원의 2년 차에는 졸업논문을 써야 한다. 둘째 해에는 바쁠 것으로 예상하고, 유학에 필요한 영어 공부를 1학년 때 마무리하고 싶었다. 토플 시험공부를 시작하였다. 1988년 교원대에는 영어공부하기에 좋은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영어 랩실이 있고 토플 시험을 준비할 수 있는 교재와 어학 테이프가 많았다. 그 테이프를 거의 매일 1시간씩 들었다. 그리고 여름과 겨울 방학 때는 청주 시내의 대학교에서 진행하는 토플 특강도 수강하였다.  


당시에는 토플 시험을 매달 치를 수 있었는데, 목표로 한 브리감영(Brigham Young) 대학교 대학원의 입학을 위한 점수는 550점이었다. 영어 공부를 1년 정도 한 다음 토플을 치를 예정이었다. 한 해가 지나갈 무렵, 토플을 몇 번 응시하면 필요한 점수가 나올지 궁금하였다. 나는 뭔가 궁금하고 해결해야 할 일이 있으면 깊이 생각한 다음 기도를 하는 습관이 있다. 명상과 기도를 해 보니, “두 번” 치면 필요한 점수를 받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두 번의 시험을 한 달 간격으로 치르게 계획하였다. 


처음에 친 시험 점수는 510점이었다. 유학을 준비하는 C씨와 교원대학교 영어랩실의 조교 선생님에게 현 점수와 목표로 하는 점수를 알려주었다. 두 사람 다, 토플 점수가 한 달 만에 510점에서 550으로 향상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한 달 뒤에 치른 2회 시험결과는 550점을 간신히 넘겼다. BYU에 응시할 수 있을 만큼의 점수였다. 


미국 대학교에 지원하기 위해서는 토플 점수 이외에도 추천서 3개가 필요했다. 대학원에서 수강한 교수님 세 분께 상황을 말씀드리고 추천서를 부탁드렸다. 지도교수인 (고) 송용의, 백종억, 연문희 교수님께서 써 주셨다. 미국 유학을 위하여 추천서를 받고 논문 심사를 받는 과정에서 교수님들이 ‘설 선생은 미국으로 유학을 간답니다’라고 소문을 냈다. 이 소문 덕분인지 교수님들이 호의적으로 조언을 해 주셨다. 심사위원장이던 (고) 김종건 교수는, 내가 유학 비용과 영어를 걱정하자, “미국 대학교의 박사과정에 입학하면, 본인이 게으르지 않은 한, 졸업하는 길이 마련된다.”라고 격려해 주셨다.


미국 유학과 관련하여 한 분을 더 언급해야 한다. 교원대의 영어교육과 최수영 교수님. 이분은 교원대에 입학할 때에 필요한 정보를 알아봐 주셔서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가려는 미국대학교에서 동일한 전공으로 졸업하셨다. 최 교수님은 친분이 있는 BYU의 학과장에게 개인적으로 편지를 보내고, 국제전화로도 추천해 주셨다. 


최 교수님은 1989년 당시에 교회에서 스테이크(교구) 회장으로 봉사하셨으며 나는 집행서기로 그분의 업무를 도왔다. 그런데 한 동안 BYU 입학에 신경 쓰느라 맡은 일에 소홀하였으며, 졸업 무렵에는 매주 열리는 임원 회의에도 드문드문 참석하였다. Temple(성전)을 방문할 때도 BYU 합격에만 신경을 쓰고 기도하였다. 한 번은 Temple에서 예배드리면서 미국 대학원 합격을 바라는 기도를 하였는데, ‘스테이크 장에게 충성하라’는 뜻밖의 응답을 느꼈다. 성전을 다녀온 후로 스테이크 회장을 돕기 위하여 회의에 참여하고 노력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미국으로 박사과정 유학을 갔다.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린다. 다음 편에서는 유학하는 동안의 영어와 재정의 어려움을 어떻게 견뎌냈는지를 설명하겠다. 


Adventure is worthwhile in itself. Amelia Mary Earh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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