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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율 Apr 27. 2024

지푸라기로 이어놓은 길에 불이 붙었을 때

[일전의 편지] 이야기 하나

씻을 수 없는 아픔으로 불멸의 아름다움이 만들어지는 거라면 영원히 아름답지 않은 세상에 살고 싶다.

     고통스러움 속에서 진주가 생겨나는 거라면 영원히 진주를 만져볼 수 없어도 좋다.

     조개의 몸이 영원히 벌어지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조개는 영원히 살지 않는다.


그럼에도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진주가 있고 그들 중 대부분은 모래알과도 다를 바 없는 불멸성만을 지닌다.

     그러나 모래알에는 아름다움이 없다. 그것은 아픔이 아닌 죽음의 흔적이다.

     그래서 나는 진주가 아닌 모래알을 품고 싶다.

     조개의 안에서 세상을 빛낼 것을 빚느니 영원히 조개를 덮어버리는 쪽을 선택하고 싶다.

     그래서 내 앞으로의 기록은 모두 모래의 흔적이다. 한 번의 파도로 모두 흩어져도 좋을. 그리고 그러기를 바라는.


이 년 전 여름으로부터.


터널 속을 걷고 있는 기분이다. 출로가 보이지 않는 긴 터널 속을.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 나도 햇볕 아래서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는데.

     그리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러나 이제는 다 잃어졌다. 잊어버렸다.

     어둡고 길고 좁고 나밖에 없다. 소리는. 울리지 않는다.

     울리더라도 들리지 않는다. 나만이 들리지 않는 소리의 울림에 부서지고 있어.


대기 환자가 스무 명도 넘는 정신과 의원의 작은 의자에 나는 몸을 내려놓는다.

     사람들을 바라본다. 슬퍼하는 많은 사람들.

     나는 이제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게 된다. 빨리 여기서 나가고 싶을 뿐인 것 같다.

     스무 명도 넘는 슬픈 사람들을 거쳐서 진료실로 들어간다.

     나는 약이 효과가 있는지 판단하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의사는 약을 조절하겠다고 한다.

     나는 약을 늘리는 거냐고 묻는다.

     의사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내 몸에 더 많아진 약이 들어가고 더 이상의 판단은 없다.

     아마도 내 슬픔이 나도 먹어치우고 내가 먹는 약도 먹어치운 것 같다.

     모든 게 먹혀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그런데도 나는 약을 더 많이 먹어야 한다. 더 먹히기 위해서. 더 없어지기 위해서.


나는 이제 내가 더는 시를 쓰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차피 근래 들어 시를 하나도 쓰지 못했다.

     그러니까 상관없잖아. 나는 아무래도 좋다고 믿는다.

     사실은 아무것도 믿고 싶지 않으면서.


이 년 전 여름으로부터.


무수히 많은 것들이 살아있음을 들키는 계절.

     나는 그 면전에서 길을 잃었다.


오늘이 지나면 더 좋아지겠지. 하루가 지나면 더 나아지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날짜를 하나하나 건너왔다.

     그런데 무수히 많은 하루와 오늘들이 모조리 뒤엉켜서 아주 커다란 하나가 되었다.

     나는 그건 건널 수가 없다. 그건 건너질 수 없는 하나였다.

     그래서 나는 멈춰졌다. 아무데로도 갈 수가 없어서. 굳어졌다.

     햇볕이 무섭다. 따뜻한 게 무섭고 미안하다는 말이 무섭다. 나는 무엇에도 무엇으로도 보답해줄 수 없는데.

     왜 모든 게 꼭 흘러가야만 하는지 모르겠어. 그냥 이대로.

     단 하나의 하나가 이만 멈췄으면.


이 년 전 여름으로부터.


추신.


감정의 발화는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테두리 안에 어거지로 욱여넣고 끝내 비그러져 나올 때까지 다 헤아리지도 못한 것은 사그라진 감정이 토하고 간 찌꺼기들이다. 슬픔이건 암울함이건 짧은 시일에 모이고 고이다 휘발되는 그 모든 투명한 것들은 임계점을 넘는 순간 피에 녹아들어 혈관을 타고 몸에 돌다가 자연히 소멸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 속에 피치 못하게 섞여든 불순물은 완전히 녹아들기 전에 무엇인가에 반드시 가로막힌다. 그리고 화석처럼 굳어 아무데로도 흐르지 않는다.

     이따금 목구멍을 아득히 메우는 것. 눈물 없이도 억 억 소리가 나도록 숨통을 짓누르는 그것에게는 결코 임계점이라는 게 없어서 단지 매캐한 회색으로 덧칠되고 또 덧칠됨을 되풀이하고 또 되풀이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인간을 믿은 것을 후회할 수는 없다.

     인간을 믿는 것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자의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따라서 그것을 후회하는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럼에도 내가 후회한다면 그것은 견디지 말아야 할 것을 견뎠다는 것뿐이다. 누군가를 믿는 것과 견뎌야만 하는 것을 동일시했고 나를 내던지는 것으로 나를 방어한다는 말도 안 되는 가설을 의심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런 어리석음은 일말의 어쭙잖은 우월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나 스스로가 얼마나 나약한지 모르는 사람은 오직 나를 둘러싼 타인만이 나약할 것이라고 쉽게 단정 짓고야 만다. 그렇기에 도망치는 용기를 쉽사리 인정하지 못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온갖 날붙이들에 찔리고 베어지면서도 홀로 출혈을 감내하는 것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때 이미 내가 나약하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나는 둘 중에 하나는 반드시 버렸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그저 짚덤불에 불 한 번 놓는 것으로 전부 처음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번번이 기회를 놓쳤고 결국은 재로 변해버린 것들 뒤로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뼈에 새겨진 족쇄가 남았다.

     시간이 흘렀고 나는 이제 다시 걸을 수 있다. 다만 매 발걸음마다 살을 도려내듯 두 귀에 파고드는 파열음을 차마 어쩌지 못할 뿐이다.

     그래.

     사실은 우리 모두가 그런 족쇄를 끌며 온몸으로 앞날에 부닥쳐 살아간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각자 자신만의 대단한 방법이 있는 양 우쭐대느라 정신이 팔리곤 한다. 분수에 맞지 않는 그 모든 일을 벌이는 동안 영혼이 얼마나 육체로부터 이탈하려 벼르는지도 모르고서.

     그래서 지금 너는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제는 내가 물어도 될까.


'우리 스스로가 존재의 고결한 목적과 자신의 인간적 가치에 관해 잊은 채 생각하고 저지르는 일들을 제외한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얼마나 아름다운가(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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