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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무지개 Dec 05. 2024

운수 좋은 날

끄적거림

오늘은 운수 좋은 날이다.

정기검진이 있어 병원에 가야 하는 날이었다. 며칠 전부터 매우 귀찮고 가기 싫었다. 병원이라 꼭 가야 하지만 그래서 더 가기 싫다고 해야 할까.

늦잠을 자거나 게으름을 피울 줄 알았는데 웬일로 눈이 일찍 떠졌다. 오늘은 부지런히 갈 수 있겠군.

병원에 가기 싫은 내 마음을 달래주려는 걸까. 운전해서 가는 길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다.

깜깜한 어둠을 벗어나 해가 조금씩 떠오르고 있었다. 그 햇빛을 받아 하늘에는 어두운 푸르름과 붉은색이 함께 번져갔다.

구름마저 붉은색으로 물들어 노랗게 밝아 오는 하늘에 누군가 물감을 칠한 듯했다.

조금 남아있는 어둠을 밝히기 위해 켜진 가로등 불빛은 감상에 젖은 나에게 하얀 별빛처럼 보이기도 했다. 운전하느라 사진을 남기지 못해서 무척이나 아쉬웠다.

그 많은 날 중 사진을 찍을 수 없는 지금의 풍경이 아름다운 것을 안타까워해야 하나. 아니면 가기 싫은 길을 가는 나에게 주는 위로라고 고마워해야 하나.

둘 다 해야겠다. 오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는 또 왜 이리 감성적일까.

병원에 도착하니 오늘따라 주차장에 차가 많았다. 다른 차들은 계속해서 주차할 곳을 찾았다. 나는 다행히 경차라 많이 올라가지 않고 2층에 댈 수 있었다.

채혈 시간에 조금 늦었다. 또 다행히 사람이 많지 않아 금방 끝낼 수 있었다. 진료 전 내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간호사가 먼저 챙겨주었다.

진료를 끝마치고 병원을 나오는 순간까지 모든 일들이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약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따라 사람들은 많았지만 불편한 일은 없었다.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30분 후면 도착한다는 내비게이션의 안내가 나왔다. 그 순간이었다. 쾅!

‘쾅? 뭐지?’ 갑자기 길이 막혀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약하게 밟아서 밀린 건지 거리를 잘못 본 건지 앞차를 박고 말았다.

정신이 없었다. 비상등을 켜고 얼른 차에서 내려 앞차를 확인했다.

“괜찮으세요? 죄송합니다. 많이 놀라셨죠? 다치신 데는 없으세요?”

그 사람은 바쁘다며 짜증을 냈지만 괜찮았다. 짜증이 나는 일이었다. 미안했다. 다행히 크게 다친 데는 없어 보였다. 차도 크게 이상이 없어 보였다.

보험 처리를 하자는 말에 접수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경찰차가 보였다.

“혹시 신고하신 분인가요?”

“아니요.”

경찰이 내려서 현장을 둘러보더니 내게 트렁크를 열고 보험사를 기다리라고 알려주었다. ‘앗! 트렁크.’

정신이 없는 나에게 해야 할 일을 알려준 경찰이 고마웠다. 무언가 수습이 되는 느낌이었다.

경찰이 떠나고 트렁크를 열며 보험사와 통화를 하고 있는데 그 사람이 계속 바쁘다고 말했다.

결국 그 사람은 연락처를 주고받고 접수 번호를 확인한 후 차의 사진을 찍자마자 바로 떠났다. 밀려있는 차들을 뒤로하고 대로의 2차선 위에 나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나도 이곳에서 빨리 비켜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갓길이 있었다. 서둘러 갓길로 차를 옮기고 보험사를 기다리기로 했다.

나는 트렁크와 비상등을 켠 차 안에 잠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내가 사고를 냈다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왜 트렁크는 생각 못 했지?’

너무 오랜만의 사고라 더 정신이 없었다. 오늘 아침 어쩐지 남편에게 교통사고 보험에 관해 묻고 싶더라니. 나는 놀란 마음에 헛웃음이 나왔다. 걱정이 되고 불안했다.

그때 누군가 창문을 두드렸다.

“차 고장 난 거예요?”

경찰이 물어왔다. 뒤를 보니 아까와 다른 경찰차가 서 있었다.

“아니요. 제가 접촉 사고를 내서 보험사 기다리고 있어요.”

“그럼 안전하게 기다리고 계세요.”

“네.”

좀 전에도 경찰이 도와주고 갔는데 지금도 뒤에 같이 있어 주니 안심이 되었다. 든든했다. 이제는 아니지만 왠지 경찰 아저씨라고 부르고 싶었다.

내가 하루에 경찰을 두 번이나 만나는 일이 생길 줄이야. 평소에 그런 상황을 보기만 했지 내가 직접 겪어보게 되는 일이 생길 줄이야.

역시 사람은 겪어봐야 그 마음을 알게 되나 보다. 사고를 낸 사람은 나였다. 하지만 혼자 있던 나에겐 내 편이 생긴 것 같은 조금의 위안이었다.

보험사 직원이 왔다.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니라고 말했다. 사람도 크게 다치지 않았고, 사진으로 보면 수리비도 안 나올 수 있다고 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일단은 정말 다행이었다. 사고는 났지만 크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감사했다. 오늘은 눈물 나게 운수 좋은 날인가 보다.

수습이 끝나고 경찰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며 집으로 향했다. 집에 빨리 가고 싶었다.

집에 도착하니 엘리베이터가 점검 중이란다. 아. 나 오늘 힘든데. 다리도 아픈데.

“엘리베이터 점검인가요?”

누군가가 나에게 묻는다. 그나마 다행일까. 집으로 향하는 이 고난이 외롭지는 않겠구나. 정말 마지막까지 쉽지 않다.

나에게 오늘은 정말 힘든 날이었다. 운이 나쁜 날이었을까.

아니다. 남아있는 12월과 다가올 다음 해를 위해 오늘 하루 동안 액땜을 했다고 생각하자. 감사하게 생각하자.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나를 위로해 준 고마운 일들도 많았고, 무사히 집에 돌아왔다. 이 와중에 슬프고 웃기지만 글을 쓸 주제도 생겼다.

그러니 오늘은 정말 운수 좋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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