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겪는 이별의 아픔정도는 적어도 하나씩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오늘 내가 소개할 글은 한 사람과의 두 번째 이별에 관한 내용이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그로부터 도착한 이메일을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었다.
"오늘은 BBC 방송국 관계자를 만나서 자카르타에 방송국을 세우는 회의를 반나절 하고, 인도네시아 현지 친구들과 저녁을 하고, 내일은 다시 UN 관계자들을 만나 재정지원을 받는 것 때문에 회의가 있어"
일상을 이야기하는 그의 짧은 이메일을 확인하고 나서 나는 더 짧은 답을 했다.
"그랬구나, 많이 바빴겠네. 그래서 그 프로젝트는 언제 끝나고 다시 멜버른으로 돌아오는 거야?"
8개월째 접어들던 우리의 장거리 연애는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이 보였다.
회사에서 주고받는 매일매일의 이메일도 기다려졌고, 자카르타의 그의 하루는 어땠는지 멜버른의 나의 하루는 또 어땠는지, 우리는 우리들의 소소한 일상얘기들을 주고받으며 그의 프로젝트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예정되었던 일 년의 프로젝트가 끝이 나고 마침내 다시 멜버른으로 돌아온다는 연락이 왔다. 드디어 그 지긋지긋한 장거리 연애가 끝이 나는구나. 기쁜 마음으로 공항으로 오는 그를 마중 나갔고,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예상치 못한 제안을 받았다.
"나, UN에서 JOB OFFER가 들어왔어. 아주 드문 경우이고 이번은 2년 계약이래. 너무나 좋은 기회야, 같이 자타르타로 가자." 너무나 갑작스러운 제안에 무슨 말을 할지 생각이 잘 나잘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에게 너무나 생소한 자카르타란 도시는 그 당시 멜버른에 살고 있던 나로서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곳이었다.
"생각 좀 해볼게"
짧은 대답은 무성의하게 뱉어 버리듯이 나왔고, 택시 안에서의 몇 분 간의 고요함은 마침 시내로 들어서는 투박한 트램소리로 덮어버릴 수 있었다. 24시간을 생각해도 모자랄 만큼의 수많은 생각들과, 셀 수도 없는 이런저런 경우의 수들을 견주어 보면서 내린 결정은
"나 같이 자카르타로 못 갈 것 같아, 여기서 하는 일도 그렇고 거기서 사는 건 더 그렇고... 거기에서 아직은 살 자신이 없어"
1년간의 시간 동안 장거리연애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서로 잘 알고 있었기에 나의 그 대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더 잘 알고 있었다.
며칠 동안의 어색한 기운이 없어지지도 않은 사이, 마침내 그가 다시 자카르타로 떠나는 날이 되었다. 사실 마지막 인사말은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어느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멋진 대사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지질한 그런 대화내용도 없었고, 약간은 건조하면서, 계획한 뉴질랜드 여행을 함께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 그런 짧은 대화를 한 후 그는 택시에 몸을 실었다.
나의 20대 시절의 4년 반의 연애는 그렇게 끝이 났다.
어느덧 15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나 버렸다. 나는 더 이상 호주 멜버른에 살고 있지도 않으며, 많은 것들이, 정말 많은 것들이 바뀌어져 있으며, 나는 지금 다시 태평양을 건너 캐나다에 살고 있다.
몇 주 전의 일이다. 아침잠이 별로 없는 나는 그날 아침에도 어김없이 새벽 5시에 눈이 뜨였고, 여느 때처럼 커피를 들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사방이 고요한 새벽시간에 혼자 무언가를 하고 있으면 이상하리만큼 느껴지는 평온함이 있다. 나는 그 평온함을 좋아한다. 그날도 그 평온함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여느 때처럼 회사 이메일과 인터넷으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평소 하던 SNS를 확인하고 있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순수한 의도이든, 아니면 순수하지 않은 의도이든, 그것도 아니면 정말 단순 호기심이든, 여러 가지 이유로 자신과 인연을 있었던 사람들의 SNS 계정을 몰래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날도 그랬다.
'문득'이란 말로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찾아본 15년 전의 그의 SNS 계정에는 어디에선가 익숙하게 보았던 비디오가 하나 올라와 있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 'LOVE ACTUALLY'중의 한 장면, BAY CITY ROLLERS - BYE BYE BABY의 노래가 흐르면서 나오는, 슬프지만 그리 슬프지 않은 장례식 영상이었다.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영화에서는 그 남자주인공(리암 니슨)의 부인의 영정사진이 있었지만 내가 보고 있던 영상 속에는 나의 삶을 4년 반동안 같이 했던 그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길지 않은 그의 장례식 비디오를 보는 동안 머릿속은 텅 비어져 버렸고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았다.
몇 초인지 몇 분인지 모를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눈물이 흐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왜였을까? 아직도 15년 전 사람에 미련이 남아서인가? 그건 아니었다. 며칠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건 미안함이었다. 그 당시에는 내가 뭐든지 줄 수 있었던 상황이 아니라, 더 받고 있었던 상황이라서 거기에서 오는 뒤늦은 미안함이었다. 그것이었다.
이 세상을 좀 더 정의롭고 공정한 세상으로 만들려고 하는 행동가인 그를, 나의 크지 않은 그릇은 그만큼 울 담아내 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생각이 아닌 행동하는 사람으로, 나 자신을 더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내가 이 세상을 제대로 된 시야로 볼 수 있도록 나의 세계관을 바꿔준 그와 다시 한번, 15년이 지난 2023년 가을 새벽, 나는 또 한 번의 이별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