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 역설
2025년 여름, 포항 일본 가옥거리. 햇살이 쨍하게 쏟아지는 오후, 아들의 "타코야끼!" 한마디에 발걸음이 멈췄다. 낡았지만 정겨움이 묻어나는 작은 구멍가게.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튀어나온 듯한 그 모습에 설렘도 잠시, "현금만 돼요."라는 무심한 한 마디가 귓가를 때렸다. 카드? 당연히 안된단다. 21세기 중반을 향해 달려가는 이 시대에, 나는 이 작은 타코야끼 가게 앞에서 한없이 무력해졌다. 2025년에 왜? 이 질문은 허공에 맴돌다 사라졌다.
그렇게 허탈함과 씁쓸함을 뒤로하고 부산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먹방'의 성지라 불리는 남포동 깡통시장. 설마 했던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다. 여기도 똑같다. "현금만 가능합니다." 아니, 카드 한 장 달랑 들고 다니는 현대인이 현금 없으면 아무것도 사 먹을 수 없는 이 기막힌 구조는 도대체 무엇인가. 지갑에 현금 한 푼 없는 나는 그야말로 투명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분노와 답답함에 옆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카드 됩니다!" 오, 이 얼마나 반가운 소리인가! 마치 문명의 빛을 마주한 듯, 반가움에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내 냉정한 현실이 나를 맞았다. 가격이 500원, 혹은 1,000원이 더 비싸다. 현금을 내면 저렴하고, 카드를 내면 비싸게 파는 기이한 시스템. 대체 디지털 시대에 이런 역차별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나의 '카드 한 장이면 만사형통'이라는 자부심은 산산조각 났다. 그날 하루, 나는 그저 현금 없는 '을'일뿐이었다. 편리함과 효율성을 외치는 2025년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현금공화국이라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해야 했다.
우리는 분명 현금 없는 사회를 지향하며 나아가고 있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신용카드 보급률과 스마트폰 기반 간편 결제 시스템을 자랑한다. 버스요금을 현금으로 내면 잔돈을 거슬러 주지 않는 현금 없는 버스 정책까지 시행될 정도로 디지털 결제는 일상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여전히 현금만 받는 가게들이 존재하며, 나 같은 디지털 유목민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것일까.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배경에는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존재한다. 첫째, 카드 수수료 문제다. 특히 영세 자영업자와 전통시장 상인들은 신용카드 결제 시 발생하는 수수료가 자신들의 박한 마진을 더욱 깎아내린다고 호소한다. 정부와 카드사 간의 수수료율 인하 논의가 꾸준히 이어져왔고, 영세가맹점에 대한 우대수수료율 적용 등 많은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액 결제가 잦은 특성상 건당 수수료 부담은 여전히 크게 느껴질 수 있다. 소비자는 무이자 할부와 포인트 적립 등 카드 혜택을 누리지만, 그 이자 부담과 수수료는 고스란히 가맹점이 떠안는 구조라는 불만도 적지 않다.
둘째, 세금 회피 유인도 무시할 수 없다. 현금 거래는 카드 거래에 비해 매출을 투명하게 파악하기 어려워 지하경제의 온상이 될 수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물론 카드 결제 거부나 수수료 전가는 명백한 불법이지만, 일부 상인들은 불황 속에서 생존을 위해 이러한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셋째, 디지털 격차도 한몫한다. 모든 상인이 디지털 기기에 능숙한 건 아니며, 카드 단말기 설치나 관리 자체를 번거롭게 느끼는 경우도 있다. 특히 연령대가 높은 상인들의 경우 익숙한 현금 거래 방식을 고수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넷째, 관행과 문화 문제다. 전통시장이나 일부 골목 상권에서는 현금 결제가 오랫동안 굳어진 문화로 자리 잡았다. 소비자와 상인 모두 현금 거래에 익숙해져 있어, 굳이 변화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현금 결제 시 할인이라는 명목으로 소비자에게 현금 사용을 유도하는 것 역시 이러한 관행의 연장선에 있다.
이러한 현금의 끈질긴 생명력은 비단 한국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현금 없는 사회로의 전환이 가속화되고 있지만, 여전히 현금 결제 비중이 높은 국가들이 많다. 예를 들어, 루마니아(78%), 이집트(55%), 카자흐스탄(60%), 불가리아(63%) 등은 거래 상당 부분이 여전히 현금으로 이루어지는 대표적인 현금 강국들이다. 아시아에서는 태국(56%), 일본(51%) 역시 현금 결제 비중이 높은 편이다. 특히 일본은 세계적인 IT 강국임에도 불구하고 현금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 지난해 비현금 결제율이 39%에 머무는 등 한국이나 중국과는 큰 격차를 보인다. 이는 편리함보다는 전통적인 결제 방식에 대한 신뢰와 소상공인 보호를 중시하는 문화적 특성이 작용한 결과로 해석되기도 한다.
디지털 시대에 현금 없는 하루를 보냈던 나의 경험은, 역설적으로 아직 우리 사회가 완전히 현금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현실을 일깨워주었다. 분명 기술은 발전하고 있지만, 그 발전의 혜택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가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 특히 영세 상인들의 생존 문화와 결부된 카드 수수료 논란, 그리고 익숙함에서 오는 관행의 힘은 현금공화국의 뿌리를 깊게 만들고 있다.
카드 한 장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은 세상. 우리는 과도기를 살아가고 있으며, 편리함과 효율성이라는 큰 흐름 속에서 소외되거나 불편함을 겪는 이들이 없는지 지속적으로 살피고 보완해 나가야 할 것이다. 진정한 현금 없는 사회는 단순히 현금 사용을 없애는 것을 넘어, 모든 구성원이 디지털 결제의 혜택을 누리며 불편함 없이 경제 활동을 영위할 수 있는 사회여야 할 테니 말이다.
나는 그날, 2025년의 대한민국에서 타코야끼 하나 사 먹지 못한 채 뒤돌아섰다. 아내는 내게 만 원짜리 지폐를 내밀며 한숨을 쉬었다.
"오빠, 카드만 들고 다니지 말고 현금도 좀 챙기라니까."
나는 아무 말 없이 지폐를 받아 들고, 조용히 시장 골목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참고 자료 : 헥토데이터 블로그, 인사이드비나, 연합뉴스, 정책브리핑, 채널A 기사 자료 인용.